박명철의 축구 이야기(4) 박주영의 반전

입력 2010-06-23 17:53


모든 실수는 위대한 반전을 꿈꾼다

“인터뷰 안 합니다.”

박주영은 그렇게 말하며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아르헨티나와의 예선 두 번째 경기에서 박주영은 자신이 생각해도 끔찍한 ‘자책골’을 만들고 말았다. 멍하니 골대를 바라보던 여전히 어린 박주영이 보였다. 첫 경기 그리스 전에서 완벽한 골 찬스를 살리지 못한 부담감이 아직 가시기 전이었다.

그때부터 박주영의 움직임은 ‘이성’을 잃은 듯하였다. 만회해야 한다는 욕구로 불탔다. 골키퍼 정성룡이 볼을 잡으면 박주영은 상대진영 깊숙한 곳으로 뛰어들면서 정성룡을 향하여 손짓했다. 정성룡은 계속하여 박주영에게 볼을 배급했다.

이청룡의 골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성룡이 박주영을 향하여 볼을 보냈고, 박주영은 상대 수비와 솟구치며 경쟁하였으며, 그 볼이 이청룡에게 흐른 것이었다. 이청룡이 골을 넣었을 때 박주영은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을까?

16강을 결정지은 나이지리아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박주영은 자신의 장기인 프리킥으로 두 번째 골을 만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탄성을 지를 만한 골이었다. 아직까지 남아공 월드컵에서 프리킥으로 그렇게 아름다운 골을 만든 선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그 골을 만들기까지 박주영이 얼마나 절치부심하였을지….

안정환의 실축…위대한 반전의 출발점

박주영을 보면서 다시 2002년의 붉은 6월을 떠올렸다.

이탈리아와 벌인 16강전. 비에리 토티 말디니 파누치 등이 스쿼드를 이룬 이탈리아였다. 우승후보였고, 선수 한 사람의 몸값으로도 대한민국 선수들 전체를 상대할 만한 팀이었다. ‘AGAIN 1966’이란 카드섹션이 펼쳐졌던 바로 그 경기다.

한국은 전반 5분 절호의 득점기회를 얻었다. 패널티 구역에서 상대의 반칙이 있었고, 그 유명한 2대8 헤어스타일의 모레노 주심이 패널티킥을 선언했다.

키커는 안정환, 미국과의 경기에서 이을용이 같은 찬스를 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기억이 떠올랐을까. 왠지 불안한 슈팅은 골키퍼에게 막히고 말았다. 절정을 향하여 치솟던 안정환은 그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처럼 그라운드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곧장 이탈리아의 코너킥을 비에리가 성공시키며 1대0의 스코어를 만들었다. 그 순간 누구보다 속이 쓰린 사람은 안정환이었을지 모른다.

그 이후 안정환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운동장을 뛰었다. 8년 뒤의 박주영과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포지션을 잊은 듯 움직였고, 공이 있는 곳엔 언제나 안정환의 그림자라도 보였다. 어느 경기보다 그의 발놀림은 부지런하였다. 그리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후반 43분 박지성은 상대 페널티지역 오른쪽 라인근처에 있던 황선홍에게 패스했고 황선홍은 그대로 왼발인사이드로 감아올렸다. 그 볼이 상대편 수비수의 실수로 반대쪽의 설기현 앞으로 떨어졌고, 설기현은 오른발로 강하게 슈팅을 날렸다. 볼은 골문 오른쪽 모서리 깊숙한 지점으로 빨려들었다. 골이었다.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대전월드컵경기장의 관중들이 뛰어올랐다.

1대1 동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골을 넣은 설기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골세러모니를 하는 순간 안정환의 모습이 화면 한쪽을 차지했다. 그제야 모든 악몽에서 풀려난 듯 안정환은 깊은 날숨을 털어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때까지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그는 얼마나 자신의 실축을 자책하였을까?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실축한 선수만이 가지는 또 다른 힘을 믿었을까? 후반전에는 늘 안정환을 교체하여 체력을 안배한 히딩크 감독이었지만, 이날은 연장전까지 안정환을 교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토티의 퇴장과 함께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탈리아를 밀어붙이던 연장후반 11분, 이영표가 문전으로 센터링을 올렸고, 볼이 안정환의 솟구치는 머리에 맞으며 골로 연결되었다.

이날의 지리한 승부를 결정지으며 대한민국 축구역사를 새로 쓰는 ‘8강행’ 골이었다. 무엇보다 경기 내내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볼을 쫓아다니던 안정환의 작품이었다. 안정환은 골을 넣으며 경기를 마친 뒤 운동장에 드러누웠다. 패널티킥을 실축하며 시작된 그의 힘겨운 시간은 결국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날의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역사 상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었다. 이 위대한 역전승은 어쩌면 안정환의 실축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실수에 대한 부담을 에너지 삼았던 안정환의 골든골로 마무리하였다. 하늘이 내린 실수였다면 너무 모진 말일까? 안정환을 이 나의 히어로가 되게 한 그 실축의 순간을 나는 오래 기억하였다. 이 경기를 여러 차례 다시 보면서도 나는 그 실축의 순간에 느낀 전율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위대한 반전의 출발이었으므로.

실수하였을 때, 안정환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 언제고 있게 마련이다. 그 청천벽력 같은 결과를 초래한 까닭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일 때, 그 아찔함의 강도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일어서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안정환처럼 혼을 다할 수 있다면 그의 실수는 오히려 반전을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안정환의 위대한 반전과 함께 나는 박주영의 위대한 반전을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남아공 월드컵이 선사해준 또 하나의 감동교훈이다.

마지막으로 이영표 선수가 자신의 책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홍성사 펴냄)에서 들려준 다음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누군가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때, 난 그런 친구들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어. 지금 힘들고 어렵고 지쳐서 혹은 정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다면, 혹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지금 성공을 향해 잘 가고 있는 거라고. 원래 성공을 향해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라고. 실패와 절망감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서만 너희가 원하는 그곳에 갈 수 있다고. 그래서 내가 실패와 절망감으로 어렵고 힘들다면, ‘아! 내가 승리와 성공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라고. 그러면 틀림없지.

박명철 '아름다운 동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