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감동 느껴보라고요? 보지 못하는 심정 아세요?… 응원에 소외된 이들
입력 2010-06-22 19:43
온 나라가 남아공월드컵으로 떠들썩한 요즘 경기를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법시험이 코앞에 닥친 고시생, 피자·치킨 배달업체 직원, 지하철역과 항공사 관계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공부와 생업이 야속하기만 하다.
23일 새벽에 열린 나이지리아전을 앞두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은 말 그대로 울상이었다. 이 경기는 원정 첫 16강 진출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한판이지만 사법시험 2차가 23일부터 26일까지 치러지기 때문이다. 행정고시 2차도 29일부터 시작된다.
사시 준비생 정모(33)씨는 저녁시간대에 치러진 그리스전과 아르헨티나전은 모두 봤다.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에는 새벽에 일어나 한국전을 시청했다. 그러나 새벽 3시30분에 열리는 나이지리아전은 볼 수 없었다.
정씨는 “2006년 월드컵 기간에도 사시 2차가 있었는데 새벽 경기를 보다가 마무리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며 “당시 경기를 보지 않았다면 올해는 맘 편히 월드컵을 봤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월드컵 경기를 혼자 보기가 불안한 고시생들은 여럿이 모여 본다. 특히 남자 고시생 가운데 축구광이 많기 때문에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는 여성의 사시 합격률이 높아진다는 속설이 돌기도 한다.
실제로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 사법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은 23.9%로 2001년 17.5%, 2003년 21.0%에 비해 높았고,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는 무려 37.7%를 기록해 2005년(32.3%), 2007년 (35.2%) 보다 높았다.
고시생 최모(27)씨는 “아버지가 올해 정년퇴직을 하신다. 이번 시험에 꼭 붙어야 하기 때문에 월드컵 경기를 안 보겠다”면서 “나에겐 월드컵이 있는 올해 시험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 경기가 있는 날 주문이 폭주하는 피자나 치킨 배달업체 관계자들도 월드컵 시청과는 인연이 없다.
서울 강남의 한 피자 지점 관계자는 “한국전이 치러진 이틀 모두 예약된 주문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며 “배달원들을 모아 놓고 경기 못 본다고 짜증내지 말고 잘 참고 일하자고 교육도 시켰다”고 전했다.
거리 응원을 나온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지하철역 직원들도 월드컵 시청은 남의 얘기다. 오히려 경기 후 뒤풀이를 하느라 술에 취해 전동차나 지하철 역사에서 잠든 사람이 많아 평소보다 업무량이 늘어난다.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관계자는 “한국전이 있는 날에는 응원객이 몰리는 광화문역 등으로 지원을 나간다”며 “우리뿐만 아니라 서울 전역의 지하철역 직원 모두 정신없이 바쁘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늘을 날아야 하는 항공사 승무원들도 월드컵 경기를 보지 못한다. 대한항공 소속 8년차 승무원인 유모(33·여)씨는 “예쁘게 옷을 차려 입고 남자친구와 함께 거리 응원에 참여하고 싶지만 하늘에 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기장님이 지상 관제탑과 연락해서 중요 경기의 결과를 알려주면 기내를 돌아다니며 승객들에게 전달하곤 한다”고 말했다.
엄기영 노석조 기자 eo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