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세복협 공동 미자립교회·홀사모 돕기 캠페인] 고창 풍성한교회

입력 2010-06-22 17:30


100명 출석하던 예배당엔 11명만 남아

전북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 산 48번지. 지난 16일 서울서 차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곳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이곳 풍성한교회 김용규(66) 목사는 요즘 인근 바다로 산책 나오는 날이 부쩍 늘었다. 답답한 목회 중압감을 떨쳐버리고 싶어서다. 목회도 목회이지만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팍팍한 삶은 몸과 마음을 짓누른다. 호소할 데라곤 없는 김 목사에게 바다는 숨통을 트여주는 해우소(解憂所)인 셈이다.

김 목사는 6년 전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당뇨의 합병증이었는데 이로 인해 심장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김 목사가 병을 얻자 교회도 힘을 잃었다. 20여명 교인 가운데 9명이 교회를 떠났다. 병든 목회자와 함께 못하겠다는 표시였다.

고창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40년 서울 생활을 접고 신혼과 함께 시작한 목회였다. 삼각산 기도원에서 들었던 세미한 음성과 환상을 체험한 뒤 13년 부목회자 생활을 끝내고 고창으로 직행했다.

“내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영양부족으로 실신 상태다. 떠나라 하셨어요. 반신반의했던 저에게 하나님은 환상까지 보여주셨지요. 화창한 하늘에 이사야(41:10) 말씀이 커다랗게 쓰여 있었어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김 목사는 열심히 목회했다. 장호리 마을은 표씨와 노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부락을 이룬 동네다. 씨족부락 특유의 배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하늘나라 복음을 전했다. 병든 노인들이 낫는 기적도 일어났다. 목회 12년을 하면서 교인이 100명(교회학교 60명, 성인 40명)까지 늘었다. 3명으로 시작한 개척 당시에 비하면 엄청난 부흥이었다.

그런데 생활력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학업을 위해 도시로 빠져나갔고 고령이었던 성인 신자들이 하나둘 자식들이 있는 도시로 떠났다. 나이가 들어 사망하는 신자도 늘면서 교인은 급감했다. 지금은 초등학생 1명과 중학생 2명, 성인 8명만 남았다. 성인 중에서 김 목사가 가장 젊다. 72∼86세 사이의 노인들이 전부다.

김 목사는 그동안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교인 100명이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헌금 수준은 비슷했다. 현재 한 달 헌금은 30만원 수준. 전기, 수도요금을 내면 끝이다. 신자들이 교회 출석은 해도 봉사에 대해 인식이 안 된 탓이었다.

생계는 가끔 연결되는 기증이나 후원으로 생활했다. 또 사모가 백방으로 뛰며 도왔다. 하지만 사모 역시 최근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다. 36세에 첫 임신을 했으나 영양 부족으로 임신중독에 걸렸고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회 비품도 대부분 주워온 것이라 했다. TV는 순복음교회 농어촌선교회에서 기증받았고 선풍기는 누군가 보내왔다. 교회가 속한 교단은 예장 소속의 군소교단이어서 미자립교회 목회자를 위한 대책이나 지원이 전무하다.

두 아들을 둔 김 목사에게 가장 큰 고민은 가난의 대물림이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충당하는 아들들에게 그는 목사 아버지로서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아들아, 힘내라. 하나님이 함께하실 거야.” 사실상 김 목사 자신에게 하는 격려였다.

김 목사는 요즘 기도로 버틴다고 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만 붙잡고 산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자신이 부족한 탓을 많이 했다. 건강했다면 교회가 힘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란 자책이었다. 후회는 없냐고 물었다. “왜 없겠어요. 하지만 아직도 교인 11명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예배에 꼬박꼬박 나오는 게 열매이자 은혜이지요.”

고창=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