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찬의 ‘내가 만난 하나님’③
입력 2010-06-22 11:34
체포영장이 구속영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도주의 우려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저를 구속하여야 한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입감 절차를 밟았습니다. 목욕탕 앞에 세웠습니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고 선 것입니다. 명분은 목욕을 위해서이지만 몸에 흉기나 이상물질을 감추지나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몸 검사의 일종이지요. 그래서 그 목욕절차는 모욕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요. 그러나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단 생각입니다. 목욕이 끝나고 신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각자 살 감방이 정해지기 전에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감방을 신입방이라고 합니다. 신입방에 함께 들어온 일행이 8~9명쯤 되었습니다.
신입방에 들어가니 체격이 우람한 젊은이가 혼자 있었습니다. 그 우람이는 우리 일행이 우루루 들어갔음에도 자신의 자리를 좁히지 않고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선임자의 텃세 같은 것이지요. 그때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저를 가리켜 “선생님, 이리로 오십시오”라면서 우람이가 들으라는 듯 그의 옆 자리를 권했습니다. 우람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 말에 순응은 하는 태도를 보이며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가 저를 가리켜 “선생님”이라고 하는 순간, 너무도 부끄럽고 너무도 당혹스러워 고개가 절로 떨구어졌습니다. 죄수에게 선생님 호칭이라니, 개도 웃을 일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보니 시끄럽던 자리 정돈이 완료되었습니다. 거기가 거기인 손바닥만한 감방 안에서도 사람들은 <자리>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저렇게 <자리>를 중히 여긴다면 여길 오지 않도록 살았어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선생님 소리까지 들은 저는 매우 심한 자괴와 자책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하던 자리로 갔습니다. 그들은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만류를 거절하였습니다. 저는 화장실(?) 가까운 자리에 가서 누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약간 미안해하면서 고마워했습니다. 이제 모두들 조용해졌습니다. 10명의 성인이 새우잠 자기에도 비좁은 수원구치소 감방의 첫날밤 모습은 그랬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교도소 간부의 점호가 있은 뒤,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가장 초라한 식탁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선생님, 잡수시기 싫어도 잡수셔야 합니다”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선생님답지 못한 자에게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교도관 두 사람이 저를 데리고 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있으라면 있고, 가자면 가고, 그것으로 충분한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당도한 곳은 교도소장실이었습니다. “앉으십시오.” 소장은 매우 정중하였습니다. 죄수인 저로서는 몹시 민망하였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소장이 차를 권하였습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무거나’ 라고 했어야 옳았을텐데 그 민망한 상황에서도 커피라고 말한 제가 지금도 싫습니다. 후안무치한 짓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정국장께서 계신 동안 편안케 해드리라고 하셔서...” 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정국장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의아했지요. “밖에 계실 때 교정사업에 관심과 애정이 많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 죄수들의 교정을 잘 하여서 누범자가 없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던 기억이 났습니다. 물론 방송을 통해서였지요.
바늘방석 같았던 교도소장실을 나와 다시 교도관 두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신입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 방에 있는 일행이 제가 어디 갔다가 온 것인지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은지 잠깐 고민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하는 것이 혀를 깨물고 싶은 일이었습니다만, 그들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되도록 빨리 제가 살 감방으로 가고만 싶었습니다. 저는 독방에서 홀로 있고 싶을 따름이었습니다. 교도소장에게도 그런 의사를 피력하였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독방이 가지는 여러 의미나 위험성을 고려한 교도소장의 조치였습니다.
좁은 방에서 셋이 살게 되었습니다. 먼저 있었던 두 사람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나저나 방에 머물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검사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기도 하고, 변호사 접견을 위해 접견실로 나가기도 하고, 이른바 특별면회객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오지 말라고 해도 매일 5분의 면회를 위해 오는 아내를 만나러 면회실에 가기도 하면서 번잡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조사가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이러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운동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감방 안에서 지내야 하는 이들에게 괜스레 미안했습니다. 저는 들락거리지 않고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들락거리게 되고, 그래서 괜스레 미안해하게 되고, 어디서나 인생은 고르지 않았습니다. 감옥은 절대적으로 평등한 공간이리라 생각했었습니다. 모두가 죄지은 사람이 사는 곳이니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감옥에서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생의 불평등성을 더욱 실감하다니요. 그리고 제가 대표적인 예가 되고, 가당치도 않게 ‘VIP 죄수’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지독히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동료 죄수들은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감옥 안팎에서도 관심을 베푸니 정말 저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감옥 안에서 또 하나의 감옥을 사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내동댕이쳐졌으면 편했을 겁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학대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제 속이 다 타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매일 저를 죽이고 있었습니다(계속).
2010년 6월 20일 김종찬(전 KBS 집중토론 사회자, ‘희망의 소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