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메가뱅크는 꽃놀이패 아니다
입력 2010-06-21 17:57
“규모는 내용과 함께 성장할 때 빛을 발하는데…. 지금 KB가 규모 논할 때인가”
메가뱅크(초대형은행)가 금융권의 화제로 떠올랐다. 최근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장이 우리나라 1위 금융그룹인 KB금융의 차기 회장으로 내정되면서 “KB금융을 스탠더드차터드 금융그룹과 같은 메가뱅크로 키우고 싶다”고 밝혀 논의의 불을 지폈다.
어 내정자는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세계 50위권 은행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금융업계에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중공업이 나와야 국가의 신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메가뱅크가 당장의 관심사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우리금융 인수전에 뛰어드는 것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일견 그럴싸하다. 하지만 어 내정자의 주장엔 문제가 적지 않다. 우선 규모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어 내정자는 메가뱅크와 은행의 국제 경쟁력을 거의 같은 차원의 개념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은행의 규모에서 경쟁력이 나오는 시대는 지났다.
글로벌 위기로 메가뱅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되레 확산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행세를 도입한 배경엔 무책임하게 투자해 화를 자초하고 결과적으로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붓게 한 메가뱅크들에 대해 책임을 따져 묻겠다는 의지가 내포돼 있다.
물론 어 내정자가 주장하는 메가뱅크가 JP모건 체이스, BOA, 씨티그룹 등 세계 최대 금융그룹의 규모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게다. 아시아의 금융허브를 지향하는 차원에서라면 우리에게도 50위권의 은행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규모를 먼저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비교적 일찍부터 메가뱅크를 추진했던 일본을 보자. 일본은 1990년대 장기불황 와중에 금융구조개혁을 추구했다. 그 핵심은 국제통화로서 엔의 국제화와 세계적인 금융허브 구축이었다.
일본의 금융구조개혁에 대한 인식은 나무랄 데 없었다. 달러의 위상하락이라는 틈새를 노려 엔을 띄우고 도쿄를 뉴욕, 런던에 버금가는 국제금융 중심지로 키우겠다는 계획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당연한 목표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엔은 글로벌 위기에서 부분적으로 안정통화로 인정받고 있지만 달러를 대신할 정도의 국제통화로서의 위상은 아직 약하다. 더구나 지금 도쿄를 금융허브로 생각하는 전문가는 아시아 역내에서조차 거의 없다. 일본 금융산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엔이 국제통화로서 위상을 갖추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일본의 문제점은 방향만 있었을 뿐 인력 양성, 시스템 개발, 신경영전략이 병행되지 못한 데 있다. 90년대 중반 시중은행 13곳, 신탁은행 7곳, 장기신용은행 3곳 등 23곳의 대형은행이 포진했던 금융산업은 매각·합병 등을 통한 메가뱅크를 지향, 2000년대 중반엔 미쓰비시UFJ, 미쓰이스미토모, 미즈호, 리소나 등 6개의 파이낸셜그룹(FG)과 지방은행군(群)으로 재편됐다.
규모는 내용과 함께 성장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한국의 리딩 뱅크로서 KB가 처한 지금의 문제점은 규모가 아니라 낮은 생산성이다. 당연히 인력, 시스템, 경영전략에 대한 점검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지난 1분기 KB의 은행부문 직원 1인당 순익 1200만원은 신한은행 3200만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제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우면서 경쟁사 합병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어 내정자의 메가뱅크 주장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안타까운 대목이 있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내정자로 선임됐다고 하지만 이 결정은 지난해 말 KB금융 차기 회장 선임 결과를 사실상 뒤엎고 난 뒤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어 내정자 스스로 유념해야 한다.
어 내정자가 이명박 대통령과 절친한 관계라는 점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항간의 소문이 무성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어 내정자가 인수 합병론을 거론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이는 결과적으로 합병에 대한 불만과 반발만 키울 뿐 성과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기왕에 KB금융 회장으로 내정된 만큼 KB의 내실을 기하는 것만이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본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