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음모론의 포로가 된 지식인들
입력 2010-06-21 17:45
천안함과 6·25전쟁은 발생 즉시 음모론의 제물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련 붕괴 후 비밀문서들이 공개되자 6·25를 누가 일으켰냐는 논란은 종지부가 찍혔다. 서구에서는 6·25를 북침으로 보는 음모론에 감염됐다가 바보가 된 지식인이 적지 않다. 천안함 조사결과를 ‘진지하게’ 불신하는 우리 지식인 사회가 알아야 할 사실이다.
6·25 당시 국제사회에는 북한의 남침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작지 않았다. 전쟁 발발 다음날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테는 남한의 북침이라고 보도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도 북침을 확신했다가 레이몽 아롱, 메를로 퐁티와 심하게 다퉜다.
낭패한 사르트르는 ‘미국에 의한 남침 유도’로 입장을 바꾸는데 그 근거가 된 게 미국 언론인 이시도어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1952)라는 책이다. 스톤의 남침유도설은 진실이 명백해진 지금의 눈으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의심과 억측의 꾸러미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황과 사실을 섞은 아리송한 문체로 마치 음모가 개재된 것처럼 몰아감으로써 미국의 전쟁 수행에 다소나마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판매금지됐다.” “국무부가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그러는데 멕시코 주재 미국대사관이 스페인어판을 모두 사들여 폐기하고 있다더라.” “사르트르가 직접 불어판을 출판했다.” 인터넷이 없는 시대였지만 사실과 소문이 섞인 속삭임들이 이리저리 퍼졌다.
미국의 마르크스경제학자 폴 스위지와 레오 휴버만이 주재하는 잡지 ‘먼슬리 리뷰’에 실린 ‘콩 이야기’는 똑똑한 지식인의 과잉추론을 잘 보여준다. 6·25 직전 중국인들이 미국 콩 시장에서 콩을 매점했다. 두 달 후 뉴욕 신문이 ‘콩과 달걀 시장의 가격지지를 중지한다’는 기사에서 중국인들이 콩 매점으로 3000만 달러의 순이익을 냈다고 보도했다.
스위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세계적인 콩 생산지 만주의 콩 공급이 중단될 것이 분명하다, 남한과 대만 정부의 관계는 밀접하므로 남한이 전쟁 시작을 사전 통보해 주었을 것이고 대만 정부가 이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추측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헛발질이다.
지난 정부에서 문화재청장을 지낸 대학교수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는 말을 유행시켰다. 그 말을 “싫어하면 진실이 안보이고, 안보이면 대신 헛것이 보인다”고 응용해 본다. 최고의 단계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경지일런가.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