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6) 유학 중 어머니 쓰러졌다는 소식에 심장이 멎는 듯…

입력 2010-06-21 17:22


“인강아, 엄니가 시방….” “어머니가 왜요? 무슨 말씀이세요?”

누님의 급한 전화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멍멍해지더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막내야, 인강아, 괜찮은 겨? 정신 놓으면 안 되는 겨. 엄니가 쓰러지셨으면서도 니 건강만을 걱정하고 계신다, 시방도….”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유학 중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시고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됐었다. 어머니는 60평생의 험한 세월을 작은 육신 하나로 버텼다. 아버지 술주정에 시달리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한숨과 가슴 조임으로 사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혹시 집이라도 나가시면 어쩌나 하고 매일 걱정했다. 어렸을 때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도 집에도 보이지 않아 나는 엄마를 찾아 복숭아 과수원과 집안을 돌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한쪽 구석에서 무슨 정리를 하고 계시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발견하곤 나를 꼭 껴안으셨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갈 수 있겠니? 걱정 말그래이.”

어머니는 구압산이란 충청도의 시골 마을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셨다. 오빠는 6·25 때 전사하시고 여동생과 단둘이 남은 어머니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누구의 중매로 아버지를 만나 일찍 결혼하셨다. 결혼해 시댁에 살며 7남매가 득실거리는 가난한 아버지의 집에서 호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어머니는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을 때까지, 한 많은 한반도의 이름도 모르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식과 남편을 위해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결국 내가 중학교 때 어머니는 척추 디스크수술을 받으셨고, 그 후 부모님은 일구던 과수원을 헐값에 정리하고 대전으로 이사하셨다. 몸이 불편한 자식을 위해 밥을 지으시고 가방을 들어 주시며, 우산을 받쳐 주시며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사셨다.

어머니는 나와 단둘이 살았던 대학교 1, 2학년 때를 가장 행복해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나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가셨다. 손자를 홀로 키우며 사셨던 어떤 할머니와 함께 새벽기도도 가시고, 예배에도 참석하셨다. 오래간만에 남편으로부터 해방돼 자식 뒷바라지하는 기쁨으로 사셨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부자연스러워진 팔과 다리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머나먼 미국까지 오셔서 자식이 공부하는 것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오늘도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머니의 환경 속에 소망이 돼 주시고,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시어서 누워 있는 이 자리가 천국이 되고 믿음의 자리가 되게 해 달라고 같이 기도한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자식을 걱정하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내 가슴은 한없이 무너진다. 경기도 의왕시에 사시는 형님 곁에 계시는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치매가 심해지신다. 그래도 찬송가 중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라는 소절만은 기억하신다. 살다 보면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말이 실감난다. 오늘도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지내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병상에 홀로 계신 나의 어머니에게 주님께서 친구 되어 주시고 기쁨 되어 주시고 모든 것 되어 주시며 그의 모든 눈물과 마음의 한을 주의 병에 담아주소서.”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