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피플-K5 개발 총괄 황정렬 현대·기아차 이사] “로체 싸구려 취급 굴욕에 이 악물었죠”
입력 2010-06-20 18:00
2007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 기아차 미국판매법인(KMA). 황정렬 이사는 미국의 직원들이 공항에서 빌려 타고 왔다는 ‘로체’가 마음에 걸렸다. 인근 딜러점에서는 로체가 대부분 렌트카로 팔린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기아의 대표 중형차인 로체가 싸구려 취급을 당한다는 뜻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로체는 당시 기아의 대표 중형차였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기아 중형차가 또다시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3년 뒤 그 다짐은 K5를 통해 현실이 됐다. 지난 4월 사전계약을 시작한 K5는 이달 18일까지 계약대수 총 2만8000여대로 내수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에는 계약대수 약 1만5000대로 한국 대표 중형차 쏘나타를 제치고 1위가 됐다.
‘엠블럼을 떼고 보면 마치 유럽 고급 자동차로 착각할 것’(뉴욕타임스)이라는 등 미 언론들의 찬사도 이어지고 있다. 옵티마나 로체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다. 로체의 실패가 K5 성공의 열쇠가 됐다. 기아차 역사에 새 장을 연 셈이다.
지난 15일 경기도 화성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에서 K5 개발을 총괄한 황 이사(연구개발총괄본부 프로젝트2팀장)를 만났다. 프로젝트2팀은 중형 및 준대형 차량 개발 전담팀이다. 황 이사는 “당초 YF쏘나타 계약대수의 50∼60%인 5000∼6000대가량을 기대했다”며 “로체보다는 나을 것으로 봤지만 쏘나타를 앞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K5에 대해 한마디로 중형이 약했던 기아 브랜드파워를 극복하기 위한 제품이라고 정의했다. 이전 차량과는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황 이사는 미국에서 로체의 ‘굴욕’을 본 뒤 확 달라진 로체 이노베이션 개발을 담당했다. 하지만 기아차는 물론 그도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으로 승부를 걸고 싶었다.
“‘김빠진 콜라 같다’거나 ‘싼 맛에 산다’는 게 기존 기아 중형차였다면 K5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차량입니다. 바로 개성(personality)이죠. 예컨대 센터페시아(운전석·조수석 사이 컨트롤패널 보드) 부분을 운전석 쪽으로 9.6도 꺾은 것도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센터페시아를 운전자가 보기 편하도록 꺾자고 하자 처음엔 반대가 많았다. 세계 최초로 도입한 바이오 케어 온열시트도 최적의 온도를 찾기 위해 실험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지난 4월 말 K5가 출시됐다. 폭스바겐 파사트의 탁월한 승차감과 핸들링, 일본 패밀리세단을 능가하는 편안함, K7의 감성 디자인이 모두 반영됐다는 게 황 이사의 설명이다.
K5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일주일에 집에서 자는 날은 주말을 포함해 3일 정도. 이전 K7 개발 때부터 따지면 거의 5년을 그렇게 보낸 셈이다.
그는 직원들로부터 ‘무조건’으로 통한다. 맡은 프로젝트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달성한다는 것. 자신도 좌우명이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에 흠뻑 빠져라’라고 귀띔했다. 1985년 입사 후 대부분을 설계 및 연구개발 분야에 몸담은 만큼 차량 개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내수시장에서 날개를 단 K5는 올 하반기부터 미국, 내년부터는 유럽에 판매될 예정이다. 특히 그는 긍정적 평가가 나온 미국을 주목하고 있다. 로체 후속 차종이지만 이제는 ‘백조’로 변한 K5를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시장에서도 쏘나타와 또다시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황 이사는 “쏘나타가 진보적 스타일의 세단이라면 K5는 후륜구동 쿠페형 스포츠세단을 지향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시장이 크고 현지에서는 두 제품을 완전히 다른 차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수시장에서처럼 쏘나타와의 카니발리제이션(자기시장 잠식) 지적은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화성=글·사진 최정욱 기자 jw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