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끝나지 않은 전쟁] 생존 국군포로 510여명 추정… ‘귀환 신고’ 언제일까
입력 2010-06-20 17:43
(4) 돌아오지 않은 그들
“중국 선양(瀋陽) 한국 영사관 직원의 가슴을 마구 때리며 울었습니다. 너무나 원망스러웠거든요. 56년간의 피맺힌 고통을 조국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2006년 초 북한에서 한국에 돌아와 서울 가양동에 정착한 국군포로 이상우(가명·81)씨는 귀환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10여평 남짓한 아파트의 거실 정면 벽에는 군복을 입은 노병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는 “2006년 11월 9일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하사로 명예전역장을 받던 날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북한에 남아 있는 딸들과 손자들 때문에 가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고, 사진도 찍을 수 없다고 했다.
경남 울주에서 농사를 짓던 21살의 청년 이씨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자원 입대했다. 10일간의 훈련만 받고, 미 24사단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던 포항전선에 투입됐다. 그는 함북 신의주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다. 53년 7월 그는 국군과 중공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강원 철원 금화지구에서 포로가 돼 평남 광동수용소로 이송됐다.
이송된 지 13일 만에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이씨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함북 경원 하면 탄광에 배속됐다. 그는 “김일성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며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이 탄광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일부는 구소련 벌목장으로 팔려 가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다.
이씨는 2005년 탈북을 결심했고, 큰아들과 같이 두만강을 헤엄쳐 건넜다. 그는 “나는 운이 무척 좋았던 편으로, 많은 국군포로들이 탈북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며 “이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군포로 송환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정부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국군포로는 510여명.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추정치여서 실제로는 더 많을 수 있다.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국군포로 8만2000여명이 북한에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송환된 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국군포로 문제는 94년 고(故) 조창호 중위의 귀환으로 비로소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51년 강원도 인제에서 중공군에게 잡혀 43년간 북한 수용소와 탄광을 떠돌던 조 중위는 94년 10월 목선을 타고 서해로 탈출, ‘돌아온 국군포로 1호’가 됐다. 그는 귀환 직후 병상에서 이병태 국방부 장관이 찾아오자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잊고 있었던 조국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2006년 11월 그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6월 현재 조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모두 79명에 불과하다. ‘귀환 국군포로 유골 1호’인 백종규씨는 ‘고향에 묻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2003년 4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딸 영숙씨와 함께 조국 땅을 밟았다.
정부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장관급회담과 남북적십자회담에서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 28명의 생사가 확인됐으며 이 중 13명이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해 가족과 만났다.
국군포로 가족들은 현 정부가 이전 정부에 비해 국군포로 송환에 적극적이라며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통일부는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국군포로 및 납북자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파력했다. 국회에서는 지난해 12월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현재까지 송환을 위한 정부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