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5) 내 인생을 결정지은 두 여자, 테레사 수녀와 나의 아내
입력 2010-06-20 20:06
유학생활 6년 동안 내 인생을 결정지은 2명의 여인을 만났다. 한 여인은 지금은 고인이 된 마더 테레사 수녀다. 1993년 박사자격시험을 마치고 인도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갔다가 만났다.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왜 왔나요? 나의 아들.”
“삶에 너무 지쳤어요. 힘들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손을 잡고 빙그레 웃었다.
“이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렇게 병든 자를 돌본다고 세상이 얼마나 바뀔 것 같습니까?”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작은 일에 충성할 뿐이지요.”
그녀는 나를 그들의 채플에 초대하고 기도해 줬다. 그녀는 내가 삶에 지치지 않도록, 내 인생의 작은 일에 충성을 하도록 평상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나에게 조그마한 쪽지를 내밀었다. “침묵은 기도를 낳고, 기도는 믿음, 믿음은 사랑, 사랑은 봉사, 봉사는 평화를 낳는다-마더 테레사.”
또 한 여인은 평생의 반려자가 된 박희령씨다. 기독대학인회(ESF)에서 알게 된 윤희 누나가 소개시켜 줬다. 얼굴도 모른 채 거의 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과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틈틈이 한인교회 유치부 교사와 찬양대 첼로 반주 봉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로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편지에 생각과 기도를 담아 보냈다.
1995년 프랑스 파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학회가 종종 파리에서 열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어졌다. 독일 쾰른에 있는 그녀를 방문하곤 했다. 파리 북역에서 자정에 기차를 타면 오전 7시쯤 쾰른에 도착했다. 기차 안에서 선잠을 잔 나에게 그녀는 역까지 마중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쾰른대의 연못가를 거닐며 놀러 나온 가족들 사이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녀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여자였다. 자신의 공부와 첼로 연습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을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내가 홀로서기에 익숙한 데 반해 그녀는 더불어 서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때때로 이기적이 돼야 할 필요를 느낄 때도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택하였다. 나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그녀가 정말 좋았다.
나는 버클리 마리나에서 샌프란시스코 사이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베토벤의 ‘황제’를 들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피아노 부전공을 해 수많은 명곡을 녹음해 보내줬다. 차이코프스키의 ‘녹턴’과 막스 브루흐의 ‘콜니드라이(신의 날)’를 들으며 나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녀는 내게 기다림과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알게 했다. 또한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가끔씩 나는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한 차례 강물이 흐른 뒤 그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재활원에서 생활하던 어린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슬픔과 어둠 속에서 지낼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하지만 말구유 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하면 평안과 힘이 솟구칩니다. 주 안에서 당신의 영혼이 더욱 맑고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