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내몰린 막장인생 실제 우리 이웃 이야기죠”

입력 2010-06-18 17:38


신작 소설집 ‘어느 휴양지에서’ 펴낸 이명랑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자꾸만 코너로 몰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피할 수 없는 불행을 견디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소설가 이명랑(37)이 신작 소설집 ‘어느 휴양지에서’(문학에디션 뿔)를 펴냈다. ‘입술’(2007) 이후 3년만의 작품집이다. 8편의 수록작에는 일관된 주제가 있다. 사연은 다르지만 코너로 몰릴대로 몰린 ‘막장 인생’들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수록작 ‘끝없는 이야기’는 잇따라 닥쳐온 불행으로 벼랑에 내몰린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무능한 오빠의 야식집 계약금으로 등록금을 내주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딸 영지는 편의점으로 돌진해 들어온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죽는다. 돈이 없어 딸을 잃었다고 자책하던 엄마는 아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기겠다며 농약을 마시고 딸의 뒤를 따라간다. 오빠는 엄마가 자살 전에 보험에 가입했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험회사를 찾아가지만 엄마의 통장 잔고가 199원이라는 말을 듣는다. 보험료를 제때 납입하지 않아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말에 분개해 잔고를 1원짜리 199개로 달라고 소란을 피우다 벌금 30만원을 얻어맞은 그는 술김에 오토바이를 몰다 편의점으로 뛰어들어 종업원의 목숨을 빼앗는다.



표제작 ‘어느 휴양지에서’는 동대문시장에서 일하던 삼십대 중반의 김성식에게 병무청의 착오로 입영통지서가 날아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군 복무를 마친 지 한참이 지난 그였지만 병적 조회에서는 병역 기피자로 나왔던 것. 군 복무한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백방으로 찾아나서지만 운명은 야속하게도 자꾸만 엇나가고 입영일은 점점 다가온다.

크리스마스트리 알전구 과열로 인한 화재로 남편이 죽고, 딸과 아들도 어이없는 사고로 잃게 된 여성(‘어느 신도시의 코르니게라’), 내세울 것 없이 근근이 살아오다 재개발로 목돈을 쥐게 됐지만 일이 틀어져 집까지 날리게 된 소시민(‘황영웅 남근 사수기’) 등 주인공들에게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구한 운명들이지만 작가는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수록작들은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해 썼어요. 죄 짓지 않고 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금 가고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는 많았어요. 부도 나고, 손가락이 절단되고, 음식점에서 싸움 말리다 식물인간이 되고…. 영장을 두 번 받은 남자 이야기인 ‘어느 휴양지에서’는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제 이모부가 겪었던 일입니다.”

하나같이 비극적인 사연들이지만 풍자와 해학이 버무려진 문체 때문에 소설의 분위기는 우울하지 않다. “불행하고 힘든 상황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유전인자가 내 핏속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성격이 나도 모르게 문체로 드러난 것 같아요.”

작가는 “판소리나 민담을 즐겨 읽는다”며 “우리의 옛 이야기에 들어있는 해학성을 내 작품에도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황영웅 남근 사수기’는 판소리 형식을 채용해 해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작품이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이명랑에 대해 “이 세계에 무섭고 무거운 고통이 있음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 채 운명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도 생명의 빛이 맑게 비추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며 “웃음의 힘으로 삶과 생활의 중력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들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가”라고 평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