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줄 한마디에… 유네스코 “오비앙賞 제정 포기”

입력 2010-06-17 18:47


“오비앙 대통령님,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아프리카 적도기니의 독재자 테오도르 오비앙 응구에마 음바소고 대통령에게 이 한마디를 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유네스코는 오비앙 대통령의 기부금을 받아 ‘유네스코-오비앙 생명과학상’ 제정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17일 보도했다.

유네스코가 오비앙상 제정을 결정한 것은 2008년 9월. 오비앙 대통령은 유네스코에 300만 달러(약 30억원)를 내놓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의 제정을 요청했다. 유네스코는 생명과학 분야에 공헌한 사람을 선정해 매년 30만 달러씩 5년간 시상키로 하고, 나머지 150만 달러는 ‘시상식 진행비’로 쓰기로 했다. 유럽연합(EU)과 미국, 노르웨이가 상 제정에 반대했지만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은 밀어붙였다.

인구 100만명의 소국가 적도기니는 풍부한 석유 덕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이탈리아나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높다. 반면 평균 수명은 50세 정도로 열악하다. 유엔은 적도기니의 보건위생 상태를 세계 최저 수준으로 평가했고, 미 국무부는 인권유린 국가로 매년 지정하고 있다. 1979년부터 31년째 재임 중인 오비앙 대통령은 대부분의 국부를 차지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이달 말 제1회 ‘유네스코-오비앙상’ 시상식을 열겠다고 발표하자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 패트릭 리하이 미 민주당 상원의원은 보코바 사무총장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다. “오비앙과 그의 가족은 적도기니 국민에게서 수백만 달러를 훔친 이들입니다. 그가 유네스코에 기부한 300만 달러 역시 그 같은 부패와 도둑질로 얻은 돈인 게 분명합니다.”

콧대 높은 보코바 사무총장도 그 서한을 무시할 수 없었다. 리하이 의원은 미국의 유네스코 기부금을 결정하는 상원 소위원회 위원장이고, 미국은 유네스코의 가장 큰 후원자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그 돈은 (오비앙) 대통령 개인의 명예를 높이는 데 쓰일 돈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유네스코는 지난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긴급이사회를 열고 시상식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적도기니 정부는 “오비앙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아프리카를 아직도 식민지로 착각하는 제국주의의 발로”라고 비난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유네스코의 결정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등이 항의성명을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