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오종석] 중국인들이 보는 월드컵

입력 2010-06-17 18:16


전 세계가 월드컵 축구 열기로 뜨겁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북한이 잇따라 선전하자 아시아가 들썩거린다. 축제 분위기다. 13억 중국인들도 월드컵 속으로 빠져들었다. CCTV와 신화통신 등 중국 내 주요 언론매체들은 시시각각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소식을 전하고 있다. CCTV의 스포츠 채널인 CCTV5는 월드컵의 모든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다. 뉴스채널에서도 수시로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음식점과 상가 등에서는 TV를 통해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 경기가 열린 17일. 베이징의 한국인촌으로 불리는 왕징(望京)을 비롯해 주요 지역에서는 ‘대∼한민국’이란 응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적잖은 중국인들도 함께 응원하며 한국의 승리를 기원했다. 중국인들은 이웃나라들의 잇따른 선전에 상당한 부러움을 표시했다. 특히 강한 투지와 끈기 등을 높이 평가했다. 박지성 선수의 기술력과 투지, 북한 정대세 선수의 눈물엔 큰 감동과 함께 힘찬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 세계의 축제, 아시아의 선전에 왜 중국은 빠졌는가’라는 자책과 함께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한·일의 승리는 중국 축구가 치욕을 받도록 했다’라는 평론을 게재했다. CCTV의 앵커 바이옌숭(白岩松)은 “한국팀의 경기를 지켜볼수록 중국 축구의 암담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이 이처럼 부러워하며 한탄하는 이유는 도박과 부패로 얼룩진 중국 축구의 현실 때문이다. 승부 조작, 뇌물 수수, 심판의 편파 판정 등 각종 비리가 만연해 왔다. 급기야 지난해 10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직접 나서 중국 축구계에 고강도의 비리 척결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중국 축구계엔 사정 한파가 몰아쳤다. 공안당국은 지난해 11월 전 광저우(廣州)시 축구협회 총비서 겸 광저우 슈퍼리그 주임인 양쉬(楊旭)와 부비서장 우샤오둥(吳曉東)을 승부조작 혐의로 체포했다. 올 초에는 중국 축구계의 최고 실세인 난융(南勇) 중국 축구협회 부주석과 양이민(楊一民) 축구협회 여자부 주임 등 축구협회 수뇌부가 전격 구속되기도 했다.

신화통신은 “전 세계가 아시아 축구를 경외할 때 우리는 부끄러워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면서 “중국 축구 관리들의 부패가 중국 축구 추락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축구계 관리들의 부패와 함께 중국 축구 선수들의 부도덕성, 정신력 해이 등도 도마에 올랐다. 인터넷 매체 동방망은 “북한 축구선수들의 급여는 중국 축구선수들의 한 끼 식사에 불과하다”면서 “북한 선수들은 중국 선수들처럼 호화로운 차와 별장이 없다”고 비꼬았다. 이어 “축구계 부패는 선수들과도 관련된 사실이 드러났다”면서 “무서운 것은 경기에서 지는 게 아니고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국인들은 실력도 문제지만 만연한 부패 때문에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도 없다고 비관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의 인터넷홈페이지 환구망이 지난 11∼12일 실시한 ‘중국은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는 설문에 89%의 누리꾼들은 “자격이 없다”고 응답했다.

누리꾼들의 혹평도 쏟아지고 있다. 한 누리꾼은 “중국 축구팀에 치욕감을 느낀다”면서 “위조 축구를 하는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 또 다른 누리꾼은 “중국 축구협회 관계자와 선수들은 이번 월드컵을 보고 깨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중국 축구의 미래가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고강도 사정을 거치면서 내부 정화가 이뤄지고 있고,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변화의 움직임도 엿보인다. 13억 인구의 중국이 정신만 차리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축구팀이 다음 월드컵 때는 한국 등과 함께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가 선전하기를 기대한다.

베이징=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