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곳간에서 인심난다

입력 2010-06-17 18:13


“나도 이런 집에 태어났더라면 처칠보다 더 훌륭하게 되었겠다!” 누군가의 생가라고 하기에는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옥스퍼드의 블렌하임 궁을 둘러보다가, 한 친구의 촌평에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쳤다. 유쾌한 웃음 뒤로 은밀한 눈빛을 교환하면서.

열린 가능성 앞에서 마냥 좌충우돌할 수 있는 청춘도 아니었고, 제대로 어른도 되지 못했던 때 이야기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질투랄까 자신에 대한 연민이랄까, 삐딱한 그 생각은 그 후로도 자주 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박물관, 특히 배경이 든든해 보이는 ‘신사(紳士)들의 놀이터’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이 많지 싶다.

교토부 덴노잔 기슭의 ‘오야마자키산소(大山崎山莊)’미술관도 말하자면 그 유형이었다. 산장 주인 가가 쇼타로(加賀正太郞)는 부유한 실업가로, 일찍이 영국에 유학해 ‘신사 취미’를 몸에 익힌 인물이었다. 일본인 최초의 융프라우 완등 기록을 가진 알피니스트, ‘난화보’를 펴낸 난 전문가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그는 영국식 아르누보 산장을 손수 설계해 지었다. 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다카라테라(寶寺) 옆의 사쿠라’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참 아름다운 산장이다.

주인은 가고 기억은 남았다. 소유주가 바뀌고 퇴락을 겪다가 1990년 재개발 위기에 처하자 지역주민들이 청원운동에 나섰고 아사히맥주가 호응했다. 일본 기업메세나의 선구자로 꼽히는 창업주 야마모토 다메사부로(山本爲三郞)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이끈 민예운동 후원자였다는 인연도 있었다. 민예운동에 영감을 준 조선도자기를 비롯해 가와이 간지로, 하마다 쇼지, 버나드 리치 등이 중심인 그의 컬렉션을 기초로 1996년 지금의 미술관을 열었다.

신사의 취미는 늘 문화의 전방에 있다. 오늘날 일본의 미술관 하면 안도 다다오와 모네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땅속 보석상자’라고도 불리는 신관은 모네의 ‘수련’을 위한 안도 다다오의 또 다른 걸작이다. 이 원형갤러리로 연결되는 길고 깊은 계단도, 모네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구조도 매력적이다. 미술관 안팎으로,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하게 흩어져 있는 자코메티와 헨리 무어, 노구치 이사무 등은 덤이다. 소풍날의 보물찾기처럼 찾으면 더 즐겁지만 못 찾아도 즐겁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그 축제에서 최상은 관객으로 오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 피타고라스였던가. 신사들의 놀이터에서 행복한 관객으로 100여년의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용렬한 질투심이 스멀스멀 고마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이 맞다. 신사들의 곳간에는 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안목도 있고 철학도 있었다. 또 신사들의 곳간만도 아니었다. 시대의 첨단에서 혼을 바쳤던 작가들의 곳간, 예술과 역사를 존중했던 주민들의 곳간, 저마다의 곳간에서 넘쳐흘렀던 사랑과 열정과 기억이라는 인심이 아니었다면 축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술관 정원은 내 곳간에는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라고 나를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

성혜영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