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4) 다양한 인종·문화와 접하며 ‘편견없이 사는 법’ 배워

입력 2010-06-17 17:36


미국 유학 첫해는 학부생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들의 개방적인 성관념 때문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부모로부터 해방되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프레시맨들은 나에게 상당한 문화 충격을 주었다. 각층에는 욕실이 하나밖에 없어 아침에는 샤워하느라 전쟁을 치렀다. 2∼3년 차에는 학생들이 자체로 운영하는 코옵 하우스(co-op house)에 살았다. 우리는 싼 집세를 내는 대신 1주일에 5시간 정도를 일했다. 식사준비, 청소, 집안일 등이었다. 나는 나이 어린 학생들과 살며 그들의 고민과 인생문제를 상담해 주었다.

주말마다 댄스파티가 열리는 등 물론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그들과 어울려 사는 새로운 생활방식에 만족하였다. 하지만 이런 코옵 중에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는 아주 나쁜 곳도 꽤 있었다. 다행히 내가 살던 곳은 마약 문제가 없는 언덕 위에 있던 킹맨 홀이라 불리는 4층짜리 예쁜 집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 다른 문화와 집안 배경을 가진 아이들과 같이 살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들의 문화를, 그들의 사고체계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샤워 침대 화장실 등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방까지 여학생들과 같이 써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그들을 다른 성(sex)이 아닌 또 다른 인간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여학생들과 같이 샤워하고 같은 방에서 사는 것이 낯설었지만 곧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한쪽의 인간에 대해 자연스럽게 느끼는 법을 배웠다.

혼돈스러운 정신상태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춤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그들의 파티 문화를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철없는 듯해도 자신들의 인생 계획만큼은 철저했다. 경제력과 시간을 철저히 따졌다. 졸업하는 데까지 얼마 들고 얼마 걸리고를 정확히 계산해 돈을 빌려 공부를 하고 앞으로 어떤 직장에 들어가 얼마의 돈으로 얼마 동안 갚을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부했다.

조교(TA)를 하며 대학원 과목을 따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숙제를 하기 위해 안 풀리는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면 며칠씩 흘러갔다. 강의와 내 수업, 기숙사에서 어린 학생들과의 생활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많은 수업과 교회일 때문에 육신이 피곤한 경우가 많았다. 폐가 약했기 때문에 유학을 와서도 며칠 동안 누워 있기도 했다. 유학생활 2년차에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한 자격시험(qualifying exam)이 있었다. 이때가 부활절 무렵이었는데, 자격시험을 2주 앞두고 또 폐가 아프고, 몸이 극히 약해져 있었다. 의사는 입원하라고 권유했으나 참고 기도하며 견뎠다. 연약한 몸은 나에게 가시와 같았다. 이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를 정결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했다.

오후 5시쯤이면 학교에서 나와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바닷가로 갔다. 1∼2㎞ 되는 바닷가 산책길을 걸으며 나는 주저앉지 않으려 노력했다. 산책로의 작은 벤치에 앉아 금문교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시편을 수없이 외웠다. “내가 주의 열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