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그녀들을 홀대하고 침묵 속에 가뒀다
입력 2010-06-17 21:26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이임화/책과함께
“너무 오래돼가지고 이자는(이제는) 다 잊어버렸잖아요. 다 잊어버려요.”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은 나금영(가명)씨는 옛 일을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에 이렇게 말했지만 말문이 트자 면담자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한 시간 내내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그만큼 깊고도 깊었음을 짐작케 한다. 전쟁은 그것을 경험한 거의 모든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여성과 어린이들은 더 큰 피해자들이다. 특히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들은 미망인에 대한 주위의 너그럽지 못한 시선과 시부모의 감시와 핍박에 시달리면서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망인은 3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우리사회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한국현대사와 여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이임화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우리 사회가 방치했던 전쟁미망인의 존재에 주목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군경미망인 24명과 자녀 6명, 상이군인미망인 5명, 피학살자미망인 6명과 자녀 4명 등 모두 45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재조명했다. 그들이 털어놓은 사연에는 그들이 짊어져 온 삶의 무게와 고통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미망인이 된 경위부터가 기구했다. 이경순(이하 가명)씨는 친정집에 며칠 묵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좁은 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틈에서 남편을 발견했다.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가길래 “어디 가요?”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성공하러 가요”라고 답하고 내려갔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양희선씨의 남편은 담배를 사러갔다가 소식이 끊겼고, 몇 개월이 지나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저녁에 징집돼 전사하는 바람에 5세, 3세, 100일 된 자식 셋을 혼자서 키워야했던 미망인도 있었다.
“그냥 돌아댕기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서울서 시골로 피난 갔으니까, (중략) 애들 키워야 되는디 어떡해요. 하나는 100일 됐지, 하나는 네 살 된 거 걸렸지(걷게 했지). 그러니 아무 일도 못 하고 그냥 돌아댕기면서 얻어먹었지.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윤철희씨가 스무 살에 겪었던 사연은 전쟁미망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남편 부재(不在)의 현실을 감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쟁미망인들의 몫이었다. 남편 없는 설움을 곱씹으며 시부모와 자식들을 보호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현실 속으로 내몰렸다. 집안 살림과 육아라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 농사를 짓거나 행상과 좌판, 공장노동, 삯바느질, 미싱일 등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얕잡히지 않으려고 미망인이라는 사실을 감춰야했고, 고집스럽고 억척스러워졌으며 자식 교육에 더욱 매달렸다.
이들은 그런 부담 속에서도 시부모의 일상적인 통제와 감시를 받아야 했다. 특히 전후에 상이군인과 결혼했던 이들 중에는 불편한 남편을 돌보면서도 ‘바람 피우지 않느냐’는 남편의 의심과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군경미망인들은 그나마 연금을 비롯한 약간의 보상이라도 받았지만 피학살자미망인들은 전쟁의 상처를 오로지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
전쟁은 미망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지만 국가는 그들의 상처를 제대로 어루만지지 않았다. 전쟁미망인들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막았고, 그들을 의도적으로 홀대하면서 침묵 속에 가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소수의 군경미망인만을 연금 지급대상 등으로 관리하면서 한때 30만명 이상이라던 전쟁미망인의 수는 1963년 2만7000여명으로 줄었다.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다수의 전쟁미망인들이 자신의 처지를 운명과 팔자로 돌리게 하려는 의도였다.
국가와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전쟁미망인들은 미망인의 고통과 울분을 속으로 삭이면서 살아왔다.
“진짜 나도 속이 시원하네. 살아온 역사를 누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렇게 물어봐주시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강경순씨가 털어놓은 이같은 말에서는 전쟁미망인들의 외롭고 답답했을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저작은 전쟁이 아내였던 여성들의 일상을 어떻게 뒤틀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또 전쟁 후 국가가 어떻게 개인에게 전쟁의 책임을 떠넘겨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남편을 잃고 혼자 힘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 왔던 전쟁미망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 미망인 아들의 말을 통해 전쟁 없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들려준다. 전쟁미망인들의 고통은 모두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좌우간에 우리나라고 어느 나라고 간에 다시는 이 세계에 전쟁이 없어야 돼요, 전쟁미망인이나 가족들이 살아 나가는(울먹이며) 이거는 어느 누구도 상상을 못합니다.
그 아픔!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야 평생을 한숨이고 원망이고 절망이고 그렇게 살아오셨어요. 참 이 나라 전쟁이 없겠죠. 앞으로.”(전쟁미망인 이호영씨의 아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