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4년 무사히 마치고 싶은데…”

입력 2010-06-17 18:01


예비 시장·군수님은 공부중… 희망제작소 ‘2010 시장학교’

민선 5기 기초자치단체장 당선자들이 16일 정오 서울 역삼동 삼정호텔 연회실에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그중 초선 재선 3선의 시장·군수 7명과 광역시 구청장 1명이 섞인 테이블. 영·호남에 충청도 억양까지 뒤섞인 대화가 한창이다.

한 초선 시장이 물었다.

“난 선거 때 아예 ‘행정은 부시장한테 맡기겠다’고 선언해버렸다고. 대신 시장은 중앙(부처) 가서 예산이랑 정책사업 따고, 기업 하나라도 더 만나야지. 선배님들, 이러면 어디에 문제가 생기나요?”

옆자리의 재선과 3선 시장, 군수들이 한마디씩 한다.

A=그건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참모 간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거든요. 위에서 교통정리를 해야지. 나중엔 정책이 산으로 가버려요.

B=이 사람들(공무원)한테 맡기면 혁신이 안 돼요. 부군수 부시장이 말 그대로 행정관료 아닌가. 변화를 싫어해요. 틀에 갇혀서 평생 그 틀에서만 일하려고 해요. 안정희구적인 것이지.

C=업무는 공무원이 하고 나는 시민을 챙기겠다, 이게 말은 좋은데 현실적으로는 안 맞는 거라. 직접 챙겨야 해요.

이번에는 격무와 애로사항, 월급 얘기.

A=대한민국 자치단체장, 그게 생명이 단축되는 자리라니깐. 민원 갈등 이런 게 엄청나잖아요. 국회의원은 진짜 쉬운 자리예요.

B=전직 시장이 나가면서 ‘시장 자리는 3D업종’이래. 사생활이 없거든. 민원인 만나느라 한나절 가버려. 저녁에는 조문 돌아야지. 로터리클럽이니, 라이온스클럽이니, 봉사단체니 찾아다녀야지. 술 한 잔 권하면, 어떻게? 마시는 줄 아는데 어떻게 안 받아?

C=평소에 나는 기초자치단체장 보수가 노동에 비해 적다 생각하는데. 일개 조합장보다 적잖아요.

D=아이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조합장 월급이 많다고 생각하지 시장 군수 월급 적다고는 절대 생각 안 할 걸요.

A=그래도 광역자치구보다는 시장 군수가 낫지. 인구는 구가 많지만 독자적으로 사업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시장 군수가 권한도 크고.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이들이 1순위다. 민선 5기 지자체장 임기 시작(7월 1일)을 2주일 앞두고 있는 시장, 군수, 구청장 당선자들이다. 오라는 곳도, 갈 곳도 많은 이들이 만사 제치고 전국 곳곳에서 상경했다. 도대체 무슨 모임이기에? 1박2일짜리(16∼17일) 시민단체 희망제작소의 ‘2010 시장학교’, ‘좋은 시장’ 되기 위해서다.

참석자는 권민호(경남 거제시) 김선교(경기 양평군) 나소열(충남 서천군) 유종필(서울 관악구) 윤순영(대구 중구) 임정엽(전북 완주군) 정구복(충북 영동군) 정현태(경남 남해군)씨 등 당선자 20여명과 배우자 4명이다. 민주당이 다수지만 한나라당 4명, 자유선진당 1명, 무소속 3명도 참여했다. 1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수업료는 전원 자비 부담이다. 2006년 1회 시장학교 때 참석자는 30여명.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수하러 왔다”는 선배부터 “행정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배우러 왔다”는 중앙 정치인 출신 구청장, 1회 시장학교에서 배운 걸로 ‘재미’ 좀 봤다는 재수강생, 네트워킹이 주목적인 초선까지. 모인 이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16일 하루에만 리더십과 지역사업, 주민소통 등을 주제로 13건의 강의와 3차례의 토론이 오전 10시부터 12시간 30분간 꼬박 이어졌다.

10여명의 강연자들은 해줄 말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4기 지자체장 230명 중 비리 등으로 기소된 사람은 40%가 넘는 94명. 우후죽순 난개발에 예산낭비 지역축제까지 지방자치의 비용 대비 수익에 요즘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다. 조언과 경험담이 이어졌다.

“청렴이 최고다. 뇌물 적발되면 평생 입찰 못하게 하는 청렴계약제 도입해보라.”(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중심은 절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건 변방의 마이너리티다. 지역의 여러분이 출발이다.”(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4년 전에 다들 바꾸겠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4년 후에도 달라질 게 없을 거다. 기분 나쁜가. 할 수 없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더 이상 옛날 사고를 고집하지 말라. 사람에 투자하고 문화가 돈이라는 걸 인식해라. 소통하고 연계하라.”(강신겸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어려운 민원일수록 피하지 말아야 한다. 피할수록 문제는 심각해진다. 부딪쳐서 해결해야 한다. 큰 민원 하나 해결하면 지역이 편안해진다.”(백재현 전 경기 광명시장)

“술 마실 줄 알지만 임기 중에는 절대 안 마시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재임 12년간 칠성사이다를 칠성소주라고 불렀다. 어느 자리에서든 그게 내 술이었다.”(유승우 전 경기 이천시장)

토론시간에는 중앙당의 인사개입, 공무원 길들이기, 전임자 비리 같은 민감한 이슈가 제기됐다.

21년 교수 생활 끝에 민주당 공천으로 의정부시장에 당선된 안병용씨는 “관료조직과 중앙당 양쪽에 다 뿌리가 없다. 내가 당선되고 나서 공직사회에서는 ‘살생부가 있다’는 둥 술렁인다. 당 입김도 무시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며 고민을 토로했다. 설전이 벌어졌다.

백재현 전 시장=무조건 된다, 안 된다 할 이유는 없다. 당 지역구위원장에게 추천사유를 묻고 검증해보라.

유종필 관악구청장 당선자=정당공천제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인사 문제는 결국 지자체장이 책임지는 것 아니냐.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시·도에서 먼저 (당에) 문제제기해야 한다.

유승우 전 시장=당선 후 당쪽에서 ‘면장을 누구 보내라. 안 그러면 다음 공천 못 받을 거다’ 그러더라. 그래서 ‘상관없다’고 했다. 힘들더라도 인사만큼은 양보하면 안 된다. 선을 그어야 한다.

전임 시장의 부정부패를 청소하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공무원 조직이 반발하고, 그대로 놔둬서는 개혁이 어려웠다. 다들 실태 파악이 최우선이라는 데 공감했다. 제 몸조심도 발등의 불이었다. 감옥 간 옆 동네 단체장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재선에 성공한 김선교 양평군수는 “시장 군수는 권한 세고 위험한 직업이다. 까딱 잘못하면 큰일 난다”며 “개혁, 사업프로젝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주변 관리 잘하고 깨끗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의에서 강의로 이어지는 강행군에 반쯤 졸던 당선자들이 눈을 번쩍 뜨고 열심히 메모한 순간이 한번 있었다. 박원순 이사가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예수 그림을 보여주며 겸손을 강조할 때였다.

“제가 ‘이벤트 박’ 아닙니까(웃음). 취임식 때 주민들 불러다 놓고 세족식(洗足式) 한번 해보세요. 그리고 출근할 때마다 청사 수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세요. 이게 뉴스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동네에 금방 입소문 납니다.”

‘이거다!’ 하는 눈빛을 여럿 본 것 같은데…. 결과는 조만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