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지 못한 아이돌 가수… 못 떠서 행복한 이유
입력 2010-06-17 17:42
‘스맥스’ 출신 프로듀서 박상준 … 추억이 된 아이돌 그룹 시절
디키-더키라는 댄스팀이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후인 1990년대 중반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청소년 댄스팀 중 하나. 1995년 고등학교 친구들과 디키-더키를 만든 열여섯 살 박상준은 가수의 꿈을 키웠던 ‘서태지 키드’였다.
그 후 15년. H.O.T와 젝스키스가 떴다 지고 god, 신화, 핑클, S.E.S의 시대가 오고 갔다. 그 사이 박씨 인생은 부침을 거듭했다. 아마추어 댄스팀 멤버에서 기획사 연습생, 래퍼, 보컬, 프리랜서 음악 프로듀서, 보컬 강사까지. 달라지지 않은 건 그가 여전히 가요계에 있다는 사실 한 가지였다.
여기 하나의 현상과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아이돌 그룹 밖의 풍경과 안에서 겪은 경험을 담고 있다. 7년간 연습생이었고, 2년간 가수였던 전직 ‘아이돌’ 박상준(31)씨. 그의 얘기를 들었다.
내 직업은 연습생
전주예술고등학교 학생 4명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댄스팀 디키-더키는 96년 전국 댄스대회에서 처음 우승했다. 지금은 사라진 한 기획사가 박씨와 계약을 맺었다. 댄서에서 아이돌 연습생으로, 그건 대단한 신분상승이었다.
연습실은 서울 둔촌동 지하창고였다. 여자 한 명, 남자 세 명이 침대 세 개를 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욕실이 없어 이웃 목욕탕에 돈을 내고 샤워와 배변을 해결했다. 한밤중에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목욕탕이 문을 여는 오전 4시30분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 뒤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 눈에 띄었다. 박씨와 나중에 신화로 데뷔한 이민우 두 사람은 이듬해 SM으로 옮겼다. 이민우도 디키-더키 멤버였다. 여전히 연습생이었지만 ‘SM’ 타이틀을 단 것만도 성공이었다. 함께 준비하던 10대 소녀 3명은 곧 데뷔했다. 바다, 유진, 슈의 S.E.S였다. 백댄서로 참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신화 데뷔를 준비하던 박씨는 내키지 않았다. 이번엔 S.E.S 타이틀곡에 랩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역시 거절했다. 신화 예비멤버들은 단체로 항의했다. 하지만 연습생이 기획사와 싸워 이길 방법은 없다. 결국 박씨는 SM을 탈퇴했다. 98년이었다.
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요계를, 그리고 박씨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96년 서태지가 은퇴하자 H.O.T(96년)를 필두로 젝스키스·NRG·S.E.S·베이비복스(97년), 신화·핑클·원타임(98년)이 잇따라 데뷔했다. 이들은 대중문화 중심의 가요계를 아이돌 문화로 재편했다. 상당수는 서태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저항적 노래를 불렀다. 수많은 별이 뜨고 지는 그 시절 내내 박씨의 직업은 연습생이었다.
기회의 끝을 잡고
소속을 월드뮤직으로 옮겼다.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춤 잘 추는 연습생은 이미 차고 넘쳤다. 아이돌 2세대가 자라고 있었다. 박씨는 이를 악물었다. 오전 9시, 또래가 등교할 때 그는 연습실로 출근했다. 훈련에는 체계가 없었다. 레슨 교사도, 프로그램도 없었다. 스타 지망생들은 그저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1시간 동안 격렬하게 춤추고, 30분 간 보컬 연습을 했다. 춤추고 노래하길 10여 차례. 저녁 무렵에는 녹초가 됐다.
99년 말 그룹 발렌타인의 랩 파트를 맡으면서 데뷔했지만 연습생 신분을 탈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유행의 끝자락이던 록발라드풍 댄스곡은 이내 묻혔다. 어느 순간, 그는 연습생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기회는 엉뚱한 데서 찾아왔다. 기획사 회식자리에서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를 불렀다.
얼마 뒤 회식에 참석했던 전직 임원이 찾아왔다. “노래 잘하더라. 나랑 같이 일하자.” 그의 소개로 시즌엔터테인먼트로 옮겼다. 2003년 박씨가 리드보컬을 맡은 아이돌 그룹 스맥스의 첫 앨범이 나왔다. 이미 스타가 된 이민우가 뮤직비디오에 우정 출연했고 공중파 음악 방송에도 나갔다. 팬클럽이 생겼고 버라이어티 쇼에도 출연했다. 월수입 500만원. 제법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출발이 늦었다는 걸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99년 데뷔한 god는 아이돌 가수의 흐름을 바꿨다. 저항, 비판을 내세운 전사(戰士)형 아이돌이 사라지고 공감형 아이돌이 등장했다. 2000년 MBC TV ‘god의 육아일기’는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친근한 아이돌의 탄생을 알렸다. 97년 외환위기 여파도 컸다. 핑클을 비롯해 코요태·샵(98년), 플라이 투 더 스카이·애즈 원·클레오(99년), 량현량하·샤크라·파파야(2000년) 등의 부드러운 음악이 시장을 휩쓸었다. 신화는 ‘몸짱’ 아이돌을 유행시켰다. 가수 비, 2PM 등 이른바 ‘짐승돌’의 시작이다. 기획사별 계보도 생겼다. 일본 스타일의 SM엔터테인먼트와 미국 스타일의 JYP엔터테인먼트, 힙합을 고수하는 YG엔터테인먼트로 성격이 분명히 갈렸다.
‘걸(girl)’들에게 밀려나다
스맥스는 2004년까지 2년간 ‘비교적’ 롱런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미 박씨 나이는 스물다섯. 더 이상 음반 제의는 들어오지 않았다. 2006년 군대에 갔고, 제대 후 앨범 발매를 타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세상은 걸 그룹 판이었다.
“행사 초대 1순위는 말할 필요도 없이 걸 그룹이죠. 다음은 남성 아이돌이 아니라 싸이처럼 ‘잘 노는’ 그룹이 2순위예요. 소녀시대를 초청했다면 멤버가 전부 다 오느냐, 일부만 오느냐에 따라 몇 천 만원씩 출연료가 달라질 정도예요.” 박씨는 걸 그룹 열풍을 이렇게 설명했다.
20대 후반 군필자가 다시 아이돌이 될 방법은 없었다. 솔로 남자 가수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았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으면 ‘뜨지’ 못했고, 뜨지 못한 가수에게는 노래 한 곡 부를 기회조차 없었다.
걸 그룹 전성기는 2007년 원더걸스부터 시작해 소녀시대에서 폭발했다. 지난해에는 애프터스쿨, 에프엑스, 2NE1, 포미닛, 티아라 등 7개 그룹이 한꺼번에 데뷔했다. 공통 코드는 ‘섹시’. 더불어 ‘섹시’를 소비하는 30∼40대 남성 팬층이 등장했다. 구매력 높고, 인터넷 정보 전파력이 뛰어난 이 ‘삼촌팬’은 새로운 팬덤 문화로 주목받았다. 문화사회연구소 김성윤 연구원은 “조카 같은, 그런데 섹시한 걸 그룹들이 서태지 시절 1세대 팬클럽이었던 남성 직장인의 과거 경험을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돌의 마지막
“아주 좋아. 싸비 부분 더블링할 테니까 한번만 더하자.”
지난달 26일 서울 논현동 한 녹음실. 박씨가 아이돌 그룹 대국남아의 최종 녹음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싸비’는 후렴구, ‘더블링’은 노래를 겹쳐서 녹음해 강약을 살리는 것을 뜻하는 업계 은어다. 박씨가 마이크에 대고 외치자 노래하던 스무 살 연습생 미카가 “괜찮았어요?” 하며 씩 웃는다.
박씨는 제대 후 독립 레이블(음반사)에서 싱글 앨범 몇 장을 낸 뒤 가수 활동을 접었다. 작곡과 녹음을 배워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변신했다. 대국남아의 정규앨범은 그가 프로듀싱하는 첫 작품이다. 기획사 의뢰로 연습생에게 보컬 레슨도 한다. 아이돌 과외교사인 셈이다.
“연습생 시절 노래 실력만큼은 인정받았거든요.”
디키-더키 멤버 중 지금도 음악을 하는 건 박씨뿐이다. 올 초 입대한 이민우는 당분간 활동이 어렵다. 한 명은 전북 전주에서 PC방을, 나머지 한 명은 광주에서 보험설계사를 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은 많은 훈련을 받습니다. 예절과 개인기까지 다 교육받아요. 성대모사나 코믹 춤 동영상을 기획사 내부에서 돌려보고 보완지시를 내리곤 합니다. 예능 프로그램을 위한 준비가 그 정도이니 본업인 노래나 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대부분 실력이 출중한데… 오래가지 못해요.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죠. ‘살아남는’ 훈련은 받지 못한 거예요.”
최근 삼촌이 옛날 얘기를 꺼냈다. “네가 SM 탈퇴했을 때 네 엄마가 펑펑 울었다”고 했다. SM에서 계속 활동했다면 그는 지금 슈퍼스타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연예인은 상품이잖아요. 그땐 어쨌든 나란 상품이 좋지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신화를 탈퇴하지 않았으면 아마 정상까지 갔겠죠. 그러다가 잊혀졌겠죠. 그걸 견딜 수 있었을까 싶어요. 정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 주변에서 워낙 많이 보니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박씨를 지탱하는 건 연습생 박상준을 좌절시켰던 것들이다. 보컬에 대한 고집과 애정. 그게 프로듀서이자 보컬 강사 박상준의 재산이다.
“친구들은 (가요계를) 다 떠났는데 나는 지금도 곡 쓰고 노래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내가 더 행복한 거겠죠.”
내려오는 일은 오르는 일보다 힘들다. 아이돌 그룹의 해체에는 늘 스캔들이 따라다닌다. 한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가 1년 전쯤 인기 아이돌에 얽힌 에피소드 한 토막을 전했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잘 나가는 멤버가 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내 생일인데 마침 CF를 찍었네. 저녁 먹자. 선착순 1000만원!” 이날 멤버들은 실제 10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씩을 각각 받았다. 선착순은 그냥 명목이었을 뿐 자기보다 수입이 적은 동료들을 달래기 위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멤버 간 인기와 수입의 격차가 벌어지고, 돈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고…. 아이돌 그룹의 90%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팀 해체 후 살아남는 이는 더욱 드물다. 기획사 대표나 음반 제작자로 변신하는 극소수를 빼면 소리 없이 사라져간다. 이 때문에 요즘은 연기, 예능 분야를 염두에 둔 팔방미인형 아이돌이 대세를 이룬다. 아예 연기자 겸업을 염두에 두고 가수 데뷔를 하는 경우도 많다. SM엔터테인먼트가 만든 SM아카데미는 실용음악과 연기를 함께 가르친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