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 사태 인종청소 양상, 우즈베크系 물고문도… 20만명 피란

입력 2010-06-16 21:17


방화와 약탈을 넘어 물고문과 집단 성폭행, 그리고 살인….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키르기스계 국민이 우즈베크계에 자행하고 있는 집단적인 ‘종족 학살극’의 모습이다. ‘인종 청소’나 다름없다. 정치적·경제적 배경을 달리하는 두 민족이 주도권을 놓고 충돌하는 양상이다.

◇“인도주의의 위기가 자라고 있다”=키르기스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탈출에 성공한 우즈베크계 세 자매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16∼23세인 그녀들은 탈출 전 키르기스 남부 지역에서 수많은 키르기스계 남자들로부터 수시간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지금 그녀들은 공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AFP통신은 우즈베크계 주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면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 자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인도주의의 위기가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28세의 한 우즈베크계 청년은 목에 자상을 입은 채 물고문을 당했으나 가까스로 우즈베키스탄 동부 안디잔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안디잔에서 한 소년은 키르기스계 폭도들이 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국경 근처에서 AFP 기자를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오쉬에 있는 우즈베크계 주민 절반이 죽었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키르기스 남부 제1의 도시인 잘랄라바드와 제2의 도시 오쉬에서는 지금도 우즈베크계 상점과 집을 대상으로 한 방화와 약탈이 계속되고 있다. 또 오쉬 도심에서는 수십발의 포격이 45분간 계속됐으며 장갑차 소리가 들렸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이렇게 되자 우즈베크계의 엑소더스(대탈출)는 멈추지 않고 있다. 엄청난 난민 규모에 놀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부상자를 제외한 사람들에 대해선 국경을 봉쇄하자 수천명의 우즈베크계 주민들이 국경 인근에서 국경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안드레이 마헤식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 대변인은 지금까지 우즈베크계 주민 20만명이 남부 소요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7만5000명의 우즈베크계가 우즈베키스탄으로 피난했다고 발표했다.

키르기스 보건부는 지금까지 178명이 사망하고 1866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으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사망자가 수백명에 달한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유럽연합(EU)은 난민 구호를 위해 500만 유로(약 75억원)를 투입키로 했다.

◇“두 민족 간 정치·경제적 대충돌”=유엔은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는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특정 대상을 겨냥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뤄진 강력한 징후가 있다”고 말해 민족분쟁의 배후설에 무게를 실었다. 키르기스 과도정부는 민족분쟁의 배후에 지난 4월 축출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전 대통령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32)가 있다고 주장했다. 막심이 최초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막심은 공금유용 등의 혐의로 인터폴의 수배를 받아왔으며 지난 14일 영국에서 체포됐다.

이 같은 배후설엔 남부 지역에 몰려 있는 우즈베크계가 지난 4월 반정부 시위로 축출된 바키예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반면 키르기스계는 현 과도정부를 지지하는 정치적 역학구도가 작용하고 있다. 우즈베크계가 남부 지역에선 다수를 차지하며 경제 주도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던 점도 키르기스계의 불만을 키웠다는 분석이 있다. 결국 장기적인 경기침체,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민족분쟁으로 이어졌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