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동수] 남북한과 兩岸
입력 2010-06-16 17:43
1996년 3월 대만해협에 극도의 위기감이 조성됐다. 총통선거가 한창인 가운데 대만 독립 성향을 가진 리덩후이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되자 중국정부가 이를 저지하려 대만해협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탓이다. 중국은 타이베이에서 멀지 않은 지룽과 남부 최대도시 가오슝 인근 바다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핵 항모인 인디펜던스와 니미츠를 인근 해역으로 보내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초래됐다.
당시 현장에 급파돼 살펴본 대만은 그러나 생각보다 차분했다. 정치권 에선 친중파와 독립파가 다른 목소리를 내며 다퉜으나 대다수 국민은 별 동요 없이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만군의 모습이었다. 중국과 근접한 섬의 군기지에서 만난 대만 병사들은 어렸지만 강인했다. 이들은 중국의 위협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결사항전의 태세가 가득했다.
양안 위기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1999년엔 리덩후이 총통이 다시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며 양국론을 주장하자 중국은 즉각 전쟁 불사론을 꺼냈다. 다음해인 2000년 3월엔 대만 독립을 당 강령으로 내세운 민진당 천수이볜 당수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양안 관계는 더욱 틀어졌다.
양안 관계 악화의 절정은 2004년 가을이었다. 대만 정부가 독립을 향한 행보를 계속하자 중국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듯 미사일 공격을경고했다. 이에 여우시쿤 대만 행정원장은 중국이 미사일 100개를 발사하면 대만은 5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중국군이 타이베이와 가오슝을 공격하면 대만군은 상하이를 칠 것이라며 맞짱을 떴다.
험악하던 양안 관계는 2008년 5월 민진당 정권이 물러나고 국민당의 마잉주가 총통이 되면서 변화를 겪는다. 마 총통은 취임 후 협상과 화해의 원칙을 천명하고 양안의 긴장 완화와 공동 발전을 추구했다. 그 결과 양측은 이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의 기본 합의에 도달해 이달 내로 협정을 체결할 방침이다. ECFA는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아 체결되면 중국과 FTA협정을 맺지않은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대만해협과 한반도는 오랫동안 아시아의 2개 주요 분쟁지역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만해협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반면 한반도는 북한의 도발로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동수 논설위원 d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