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 (木) 화해의 대사

입력 2010-06-16 17:57


찬송: ‘그 영원하신 사랑은’(통 407)

신앙고백: 사도신경

본문: 고린도후서 5장 20절

말씀: 베를린장벽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동독에서 쓰레기를 장벽 너머 서독으로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먹을 것을 담았던 빈 깡통, 빈 박스 등의 쓰레기가 끊임없이 버려지는 것으로, 이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서독 측 관계자들은 대처방안에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독 측은 그 쓰레기의 빈 박스에 최상품 내용물로 가득 채워 대형 트럭에 실어 동독 측 쓰레기 매립지에 살며시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물품들 중앙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가슴속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법입니다.’ 동독 사람들은 이 짧은 글귀에 쓰레기를 버렸던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는지, 그 후로는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 같은 짓을 멈추었습니다. 이 작은 일로 동독 사람들과 서독 사람들은 마음의 벽이 조금씩 무너지며 서로 소통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독일의 통일대업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묻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가슴속은 무엇으로 가득 채우셨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혹 나누어 줘서는 안 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내 가슴에 던진 사람들에게 서독 사람들이 한 것처럼 살며시 더 좋은 것으로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신기하게도 화풀이를 한 것보다 속이 편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쓰레기를 내 가슴에 던지는 짓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야심한 밤에 어떤 이들이 시장 통 좁은 길 중앙에 큰 돌을 놓아두고 갔습니다. 날이 밝자 사람들이 시장 통에 모여 들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중앙에 큰 돌을 보며 욕지거리를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에이 천하에….’ 그때였습니다. 손수레를 끌고 가던 한 농부가 여러 사람들이 불편해 할 것을 생각했는지 어렵사리 그 돌을 옮겨 길가로 치웠는데, 그 돌 밑에 이게 웬일입니까? 금 100냥과 왕의 친서가 있었습니다. ‘이 금은 돌을 치우는 자의 것이다.’

허허, 이런 횡재가. 어떻습니까. 이런 복 좀 받지 않으시렵니까? 확실히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배려입니다. 제 생각에는 유교의 ‘인’이나 불교의 ‘대자대비’나 기독교의 ‘사랑’이나 그것들이 표현될 때는 소박하게 ‘배려’라는, 더 쉽게 말하자면 ‘보살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슴속에 있는 사랑을 배려라는 아름다움으로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신’인 화해의 대사라면 더욱이 ‘사랑하고 배려하는 일’만이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려운 질병에 걸린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분노로 인해 병마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됨으로 대부분 회복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배려라는 명약을 쓰게 되면 달라집니다. 밉기 만한 병마조차 사랑 안에서 녹아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에도 인간관계에도 어디든 쓸 수 있는 명약입니다. 화해의 대사들은 배려인 명약을 휴대합니다.

기도: 사랑하고 배려하는 화해의 대사가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장현승 목사(과천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