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 위의 ‘특급호텔’ 타고 전국으로 고고싱… ‘해랑’으로 떠나는 럭셔리 투어
입력 2010-06-16 17:24
‘해랑’이라는 이름의 레일크루즈 관광열차는 한국판 ‘블루트레인’이다. 크루즈 여행처럼 밤에는 이동하고 낮에는 기차에서 내려 관광을 한다. 해랑은 블루트레인처럼 야생동물들이 뛰어노는 남아공의 광활한 초원을 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와 더불어 금수강산을 둘러보는 열차라는 의미의 순우리말 해랑에 걸맞게 구석구석의 감동을 찾아 전국을 달린다.
#DAY 1-낮
설레는 가슴들이 오전 8시 서울역 3층 역장실 옆의 VIP룸에 모였다. 황혼의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딸의 손을 잡고 나타난 중년의 부부, 그리고 친구사이인 중년의 여성들이 소파에 몸을 묻고 담소를 나눈다. 감청색 제복 차림의 해랑 승무원들이 환한 미소로 특별한 여행이 보장된 승차권을 나눠준다. 친절한 서비스가 되레 낯선 여행자들이다. 서먹한 표정으로 승무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봉황 무늬 선명한 해랑에 오른다.
해랑의 객실은 ‘달리는 호텔’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화려하다. 블루트레인처럼 좁고 긴 객차의 복도 끝에 1박2일을 안온하게 보낼 객실이 기다리고 있다. 카드 키로 문을 열자 넓지는 않지만 둘이 여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더블침대와 화장실을 겸한 샤워실이 앙증맞다. 호텔처럼 벽걸이TV와 에어컨, 세면도구 등은 기본.
해랑의 탄생은 다소 드라마틱하다. 코레일은 2007년에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는 남북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북한 땅을 관통해 중국으로 가는 응원열차를 기획했다. 열차 개조 작업이 끝날 때쯤 남북관계가 냉각되고 고심 끝에 응원열차는 한국판 블루트레인으로 변신한다.
승객들의 서먹한 분위기를 풀어줄 임무는 다재다능한 승무원들의 몫. 해랑 이용법과 스케줄 소개가 끝나자 선남선녀들로 구성된 6명의 승무원들이 즉석에서 아카펠라 공연을 한다. 팔방미녀 여승무원의 플루트 연주가 끝나자 남승무원의 마술이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블루트레인에서는 볼 수 없는 프로그램들이다. 서먹서먹하던 승객들이 드디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해랑은 모두 10량으로 구성됐다. 기관차와 발전차가 각 1량이고, 객실차는 6량, 레스토랑 객차와 이벤트 객차가 각 1량이다. 객실은 디럭스룸 12실, 패밀리룸 8실, 스위트룸 3실 등으로 최대 승차 인원은 53명. 승무원 1명이 채 10명도 안되는 승객을 책임지는 형식이다.
해랑이 기적을 울리며 영동역에 도착한다. 분홍색으로 단장한 영동역을 나서자 버스가 기다린다. 해랑의 컨셉은 크루즈여행처럼 역에서 내려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고 기차로 이동하는 것으로 전용버스는 역과 관광지를 연결해준다.
영동의 와인코리아는 국산 와인 샤또마니를 생산하는 업체. 와인 향기 그윽한 족욕탕에서 서로 발을 맞대고 피로를 푼 후 와인을 곁들인 점심식사를 한다. 이어 버스를 타고 와인 보관 토굴로 향한다. 토굴은 일제강점기 때 탄약고로 쓰던 동굴로 매천리 일대에는 토굴이 약 90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두컴컴한 토굴에서 와인이 익어가는 향기에 듬뿍 취한 관광객들은 오후 2시에 해랑에 올라 휴식을 취한다.
#DAY 1-밤
통유리로 이루어진 해랑의 전망창은 달리는 풍경화. 아늑한 침대에 누워 전망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감상하다 설핏 잠이 들었다. 해랑은 어느새 해운대역에 도착했다. 해운대 인근 호텔에서 푸짐한 뷔페로 여유로운 만찬을 즐긴다. 마주앉은 승객들이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다정한 이웃으로 변신한다.
만찬 후에 해랑 승객을 위해 기다리는 이벤트는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아이다 공연. 해운대 백사장 에 마련된 야외무대에서 저물어가는 바다를 배경으로 초대형 오페라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장 주변은 공연 후 중계될 남아공월드컵 한국 대 그리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만 명의 응원단으로 인산인해를 연출했다. 응원단의 붉은 파도에 둘러싸인 해변에서 보는 아이다 공연의 감동은 자연스럽게 월드컵 응원전으로 이어졌다.
해운대 백사장에서의 추억을 모래에 새긴 관광객들이 해랑의 이벤트 객실에서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와인 등을 즐기며 한국팀의 승리를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어 라이브 가수의 공연이 이어졌다. 결혼 2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전에서 해랑을 탔다는 김윤성(54)씨가 아내 최원옥(52)씨에게 눈물겨운 영상편지를 보냈다.
“여보, 28년 전 오늘 우리는 기차를 타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었소. 그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한 당신에게 감사하오. 살아오면서 당신께 잘 해주지 못한 것들을 용서해주오. 그리고 아프지 말고 오랫동안 함께 삽시다. 사랑해, 여보!”
숱한 사연과 설레는 가슴들을 실은 해랑은 밤새 어둠 속을 달려 포항역으로 향했다.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지만 미세한 열차의 흔들림이 오히려 수면제처럼 황홀한 꿈나라로 인도한다.
#DAY 2
차창 틈으로 새어드는 아침햇살에 눈을 떴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해랑의 디럭스룸은 호텔 객실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남아공의 블루트레인은 침대가 소파를 겸해 기차가 달리는 동안 삐걱거려 숙면을 취하지 못했지만 해랑은 달랐다.
해랑의 식사시간은 여느 패키기 여행과 다르다. 메뉴도 다양할 뿐 아니라 지역의 별미를 맛보는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음식기행을 겸한다. 포항역 앞 음식점에서 신선한 대구탕으로 아침식사를 마치자 전용버스가 포항 호미곶으로 안내한다. 이어 해랑 승객들이 수학여행과 신혼여행의 추억이 서린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옛 기억을 더듬는다.
짧지만 긴 1박2일 여행을 마무리 할 시간. 승객들은 삼삼오오 해랑 카페 선라이즈에 모여 다과를 들며 연락처를 주고받는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는 없다.
하지만 레일크루즈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공동의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글·사진=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