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끝나지 않은 전쟁] 분단의 상징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입력 2010-06-15 22:00
(3) 전쟁 상흔 남은 DMZ와 NLL
‘형제 마을’ 남북으로 갈리고 강제이주 ‘恨 맺힌 땅’
일제의 사슬로부터 풀려나자마자 한반도는 다시 남과 북으로 갈렸다. 민족이 분단된 지 60년. 155마일 비무장지대(DMZ)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직도 남북의 허리를 잘라놓고 있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북쪽의 ‘민북마을’ 주민들은 오늘도 세월의 질곡을 뒤로 한 채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단절되고 뒤엉킨 유곡리 역사=13일 중부전선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통일촌’. 남방한계선 철책 너머로 북한 오성산이 보인다. 마을회관과 북한군 초소와의 거리는 불과 2㎞. 마을 사방에는 모두 군사용 펜스가 둘러쳐져 있다.
유곡리에는 남다른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6·25전쟁 직전까지 유곡리는 강원도 김화군 근북면에 속한 북한 땅이었다. 하지만 전쟁 때 국군 북진에 따라 건천·백덕·금곡리 등 3개 ‘형제 리’들과 달리 유곡리만 남한에 편입됐다.
마을 토박이 이점용(73)씨에게 6·25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이씨는 광복 뒤 5년간 북한 통치 아래서 자랐다. 13세가 되던 해 전쟁이 났고, 100여 가구가 오순도순 살던 마을의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쟁 발발 석 달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곧바로 마을에 국군과 미군이 들어왔어. 그러다 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할아버지를 비롯해 10명이 넘는 대가족 모두 미군트럭에 실려 서울 천호동 피난촌으로 강제 이주됐지. 난리 중에 참 많은 사람이 죽었어. 인민군이 점령했을 땐 ‘반동’이라고 해서 죽이고, 국군이 점령했을 땐 ‘빨갱이’라고 해서 죽이고….”
이씨는 서울에서 경기도 수원 피난민 수용소로 옮겨지기 직전 가족과 함께 도주했다. 북쪽지역에 살았던 탓에 “불안했다”고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소작농을 하며 살던 이씨 가족이 마을로 돌아온 건 1973년 8월 23일. 6촌 형님이 “정부에서 유곡리 입주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씨는 고향에 묻히길 원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귀향을 결심했다. “돌아와 보니 옛 마을은 폭격을 맞아 다 불탔더라고. 먹고 살라고 땅을 3300평(1만909㎡)씩 나눠줬어. 5∼6년은 황무지 개간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지.”
유곡리 주민들의 한(恨)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입주 당시 정부에서 토지 원소유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줄을 그어 나눠주는 바람에 토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게 됐어. 정부가 입주 시 경작권을 약속해서 삽과 곡괭이만으로 황무지를 일궈내 옥토로 만들었는데 갑자기 원소유주가 나타나 내놓으라고 해 고생만 하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그런데 정부는 옛 정권의 일이라고 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최승길(74) 이장이 말했다. 82년부터 93년까지 시행된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전등기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이주민들은 피땀 흘려 개간한 옥토를 모두 원소유주에게 돌려줘야만 했다.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유곡리를 품고 있는 철원은 곳곳에 전쟁의 생채기를 지니고 있다.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해발 395m 야산인 백마고지는 분단의 상징이다. 백마고지는 평강을 정점으로 철원과 김화를 잇는 6·25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철의 삼각지대. 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국군 9사단과 중공 38군 3개 사단이 12차례 전투를 벌이며 27만여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사상자만 1만3000여명에 달했다. 지금은 기념비와 충혼비, 위령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남동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북한 공산정권이 철원, 김화, 포천, 평강 일대를 통치하기 위해 광복직후 건립한 노동당사가 서있다. 건물 외벽 곳곳에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게 나 있어 그때의 참상을 말해준다.
철원=정동원기자 cd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