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65년 만에 부친 유골 마주했지만 결국 못 모셔왔죠”
입력 2010-06-16 13:34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3부 강제동원 더 깊이 들여다보기
④ 강제동원 미귀환의 상징, 유골
포항 출신 진상윤(77·사진)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국가유공자다. 전쟁이 나던 열일곱 살 때 동지중학교에 다니다 학도병으로 총을 들었다. 포항이 인민군에 함락돼 울산으로 철수하면서 미군의 오폭으로 오른쪽 고막이 손상됐다. 하지만 1953년 휴전 무렵 성년이 돼 징집영장이 나오자 다시 입대했다. 1969년 상사로 제대할 때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그런 그가, 국가유공자인 그가 일본에 강제동원됐다 홋카이도(北海道) 소라치군(空知郡)에서 사망한 부친의 유골을 마주하기까지는 처절한 싸움이 필요했다. 1942년 부친 진병락씨는 징용영장을 받은 뒤 사흘 만에 두 일본 순사에 의해 목덜미를 잡힌 채 끌려갔다. 막 소학교에 입학했던 진씨가 기억하는 마지막 부친의 모습이다. 종전(終戰)을 앞둔 1945년 3월 일본으로부터 부친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두 줄짜리 전보가 왔다. 장례식도 유골 전달도 없이 사망 통보로 끝이었다.
지난 10일 대구 신평동 자택에서 취재팀을 만난 진씨는 “일본 정부도 못 믿고, 한국 정부도 못 믿겠더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도 부친 유골이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삿포로 별원(사찰)’ 지하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에게 2005년 유골 소재지를 전해주고, 지난 4월 삿포로로 초청해 부친 유골과 조우하도록 도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일본의 양식 있는 시민과 재일동포였다. 시민단체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회원들이다.
전역 후 아버지 유골을 찾기로 결심한 진씨는 일제 당시 부친에게 징용영장을 전해준 고향 사람을 찾아낸다. 1971년도였다. 그에게서 확인서를 받아 경주세무서에 대일 민간 청구권 신청을 했다. 한·일 수교 당시 개인 청구권 포기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이 한시적으로 강제징용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보상작업에 나서던 시기였다. 하지만 진씨에게는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징용 사실을 인정받아 부친 유골을 찾겠다는 일념이었다.
1975년 한국 재무부는 4년을 기다린 진씨에게 “일본국에 증거확인 조회결과 확인불능으로 판정됨”이라고 답신을 보내왔다. 같은 해 진씨는 부친과 일본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동료를 찾아 공증까지 받은 뒤 재심을 요청했으나 역시 같은 사유로 거부됐다.
1992년 한국 외무부가 보낸 답신은 그에게 전쟁보다 더 지독한 상흔을 남겼다. “동 문제를 우리 정부가 일본에 대해 다시 거론하는 것은 국가 간 신의상 어렵다는 점을 양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당한 회신 내용이었다. 그는 “왜 사실을 사실로 인정 안 해주느냐 해도, 나라 이미지 때문에 안 된다 하니”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설립 3년이 지난 2008년 5월에야 부친의 징용과 사망이 사실로 인정받았다.
진씨의 홋카이도 방문에 앞서 지난 2월 취재팀이 찾아간 삿포로 별원 지하 1층 납골당은 향내로 가득했다. 가로 50㎝, 높이 1m80㎝의 캐비닛 형태 납골함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101위의 유골은 원통형 유골단지 3개에 담겨 납골당 제일 안쪽 1153번 자리에 안치돼 있었다. 명부상으로는 101명분이었지만 개인별로 나눠진 게 아니라, 유골 크기별로 대중소로 구분돼 합쳐져 있었다. 어느 것이 누구의 뼈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왜 유골을 합쳤느냐는 질문에 베츠단 즈이쇼 별원 부주지는 “매일 아침 추모 의식을 하는데 관리 문제로 그랬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진씨 부친은 그나마 토목기업 나카무라구미(中村助)에 소속돼 일하다 작업장에서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유골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별원에 안치된 101위 가운데 한국에서 유족을 찾은 경우는 35위뿐이다. 일본인 추정은 10위, 중국인 추정은 6위, 본적지가 이북인 경우는 13위다. 나머지는 아직도 규명이 불가능한 무연고 유골이다.
연고가 없는 개인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일본 당국과 해당 기업이 사망 당시 조선인 유가족에게 제대로 통보하지 않고 임의로 화장해 방치했기 때문에 무연고 유골이 양산됐다. 일본의 방관자적 자세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이 얽혀 광복 후 65년이 지난 오늘에도 조선인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무연고 유골은 아직까지도 규명되지 못한 강제동원 역사의 진실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상징물이다.
무관심은 북한 정권도 마찬가지다. 2007년 12월 별원 지하 납골 창고에서는 101위 명부에 속했던 창씨명 ‘야스모토 겐지’의 단독 유골함이 추가 발견됐다. 본적지는 평안남도 중화군, 지금의 평양시 중화구역으로 표기돼 있다. 홋카이도포럼에서 북측에 신원 확인을 요청했지만 이듬해 “창씨명이라서 유족을 찾지 못한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2002년 발견된 삿포로 별원의 101위 유골은 2003년 2월 홋카이도포럼이 발족하게 된 계기가 됐다. 또 일본 정부의 공식 유골 조사를 이끌어 낸 기폭제가 됐다. 이후 포럼은 매년 한 차례씩 새로 찾은 유가족과 관련 학자를 초청해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올해는 4월 진씨를 포함해 3명의 유족이 한국에서 초청됐다. 도노히라 요시히코(65) 포럼 공동대표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유골을 통해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게 많다”고 했다.
포럼은 2005년부터 한·일 양국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조선인 추정 매장 유해 발굴 작업을 홋카이도 최북단 사루후쓰(猿拂) 마을의 아사지노(淺茅野) 비행장터 인근에서 진행하고 있다. 재일동포 출신 채홍철(57) 포럼 공동대표는 “유해 발굴과 유골 봉환은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기업이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기다리며 반세기 넘게 흘려보냈다. 그래서 민간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부친의 사망 전보를 받은 후 65년 만에 부친 유골 단지를 마주했던 진씨는 홋카이도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소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수고하는 포럼 사람들 앞에서 내가 속으로만 화를 냈는데, 그기 (유골을) 혼합 해놔서. 그건 엉망으로 해 놓은 기다. 유골 그거 그냥 놔뒀으면 됐을 것을. 이래 섞어놓으면 이거 아무데도 못 돌려주지 않나. 아버지 유골을 이따구로 해놨다. 모셔오려고 문중에 납골당 비워달라고 했는데. 그냥 돌아섰다. 유골 가루 일부를 가져와도 그게 어른 것인지 일본놈 것인지 어떻게 알겠냐. 결국은 현지에 비석 하나 세우는 수밖에….”
삿포로·대구=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