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철 축구 이야기(2)-차두리처럼 신나게...
입력 2010-06-15 17:48
차두리처럼 신나게 인생을 즐겨라
FC서울의 서포터스로 살고 싶은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
차두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로봇설’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우리들에게 유쾌한 축구선수의 아이콘이 된 차두리 말이다.
위대한 축구선수였던 아버지를 둔 차두리는 어찌 보면 특별한 환경을 가진 선수다. 차두리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축구인생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축구를 하는 이상 그는 아버지 덕분에 많은 것을 벌고 들어간다. 그건 축구를 하는 차두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프리미엄이다. 그렇게 보면 차두리는 부러운 환경을 가졌다.
물론 차범근이란 걸출한 스타를 아버지로 둔 차두리에게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이다. 잘하면 아버지 덕분이고 못하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아들이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어디를 가든 그는 ‘차두리’가 아니라 ‘차범근의 아들’일 가능성도 크다. 아버지와 언제나 비교되어 살아야 하는 아들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절망을 겪기도 하고 슬픔에 시달리기도 하는 법이다.
실제로 차두리는 그런 고민을 가끔 털어놓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차두리는 독일의 유명 구단에서 주전으로 뛰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성적은 아버지와 달리 부진하였고, 출장 횟수가 줄더니 급기야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나중에는 2부 리그의 하위 팀으로 방출되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두리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러다가 다시 어느 때부터 그의 이름이 다시 언론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차두리의 부활을 이야기하였다. 2002년 독일 진출 후 빌레펠트, 프랑크푸르트, 마인츠05를 거친 차두리는 다시 2부 리그의 중위권 클럽 코블렌츠에 입단하였고 다시 분데스리가 1부 리그 프라이부르크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프라이부르크로 오기 이전의 팀 코블렌츠는 1부 리그 승격은 고사하고 3부 리그로 탈락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클럽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했다면 포기하고 K리그로 복귀했을 수도 있다. 차두리가 K리그를 선택했다면 아마 높은 상품성을 인정받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스타로 발돋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표팀 발탁에도 더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두리는 그의 출생지인 프랑크푸르트와 인접한 코블렌츠를 선택했고, 코블렌츠의 주전으로 발돋움하며 팀의 2부 리그 잔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게다가 공격수가 오른쪽 수비수로 보직을 변경하며 마인츠 시절과는 전혀 다른 수비력을 보여줬다. 특히 선발출장이 안정되자 자신감이 생겼고, 28차례 리그 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중반에는 미드필더 역할까지 수행하며 감독의 전술운용 폭을 넓혀 주기도 했다. 차두리로선 위기를 기회 삼아 재도약에 성공한 셈이었다.
아빠는 그 무렵 차두리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것에 주목하였다.
“나는 지금 축구선수로서의 인생 자체를 즐기고 있다.”
차두리는 2부 리그 팀에서 수비수로 뛰기 위하여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낡은 옷을 벗어버렸는지 모른다. 언론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목소리에도 귀를 닫아버렸는지 모른다. 자신이 소속한 리그가 어디인지, 그것으로 평가 받는 기준을 무시해 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차두리는 비로소 축구선수로서의 인생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오히려 차두리는 그제야 자신감을 되찾고, 유쾌하게 자신의 축구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축구를 할 때 행복한가?’
차두리는 스스로 그렇게 질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차두리의 질문은 지혜롭다고 아빠는 믿는다. 나는 유럽으로 진출한 선수들, 또 K리그에서, 아니 N리그에서 축구를 하는 수많은 무명의 선수들에도 차두리처럼 그렇게 질문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질문 앞에서 그들 모두 즐거운 축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치 쯤 아랑곳하지 않고 겉치레 같은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차두리의 차범근’이 되고 싶단다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차두리는 왜 행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차범근이라는 아버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오해 없이 듣기 바란다. 차범근은 차두리처럼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우선순위에서 내던지고 축구 그 자체를 즐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차범근에게 축구는 생존의 문제였고, 대한민국이라는 자신의 조국도 고려해야 하는 위치였을게다. 자신의 수입도 생각해야 하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관계들을 하나하나 고민하며 자신의 문제들을 풀어냈을 것이다.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은 그렇게 어렵게 축구를 하였을 것이다. 축구만을 즐기기 위해 이것저것 모든 얽히고설킨 사연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아버지가 쌓은 기반 위에서 차두리는 축구만을 생각하였다.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도 않았고, 명예를 누려야 할 만큼 갈급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다져놓은 터가 있었고, 그 터에서 차두리는 말도 자유롭고 문화도 자유롭다. 독일은 차두리에게 조국만큼 친밀한 곳이다. 차두리의 오늘은 차범근의 어제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터다. 그 터에서 아들 차두리는 축구만을 즐기며 행복해 한다.
나는 서포터스의 삶을 즐기며 행복하고자 하는 네 소망을 존중한다. 그래서 차두리의 차범근처럼 너의 오늘을 위한 터를 만들고자 한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꿈꾸는 오늘의 사명이다.
그래서 아빠는 좋은 세상을 꿈꾼다. 독재자가 용인되지 않는 나라, 한 사람의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나라, 자유로이 꿈꾸는 일을 하며 행복해 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아빠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견뎌낸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견디며,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포기하며,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지대한 일이면 그렇게까지 결단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차범근은 어쩌면 ‘인간다움’조차 포기하며 자신의 가치를 일구었고, 그렇게 이룬 가치 위에서 차두리가 행복한 축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명철, '아름다운동행'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