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릴레이 인터뷰 ⑤(끝) 소설가 김원일
입력 2010-06-15 17:42
“하도 굶주려 지금도 밥에 집착 글을 읽으며 빈곤을 견뎌 냈죠”
장편 ‘불의 제전’ 단편 ‘어둠의 혼’ 등 소설에서 6·25를 말해온 소설가 김원일(68)을 만나러 최근 서울 서초동 자택을 찾았다. 5층 옥탑방을 개조한 그의 서재에는 활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어왔다. 세상은 6·25를 잊은 듯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김원일의 기억 속에는 총포소리와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생생했다.
“전쟁이 났을 때 저는 8살이었죠. 1950년 9월 29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을지로로 입성하는 장면을 똑똑히 봤어요. 아버지가 차를 가지고 올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만약 늦게 오면 왕십리에 있는 동지네 집에 가 있으라고 미리 말해 놓은 상태였어요. 총소리가 나서 보니 무장한 흑인 병사 몇이 뭐라고 소리쳐요. 동네 주민이 (북한군 협력자라고) 우리 집을 손가락질한 거예요. 누나가 ‘엄마, 우리 집으로 미군이 처들어 온다’고 소리쳤지요. 우리는 짐을 챙길 새도 없이 건너편 골목으로 숨어들었어요. 골목에는 북한군이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있고 반대편에는 철모를 쓴 미군이 총을 쏘았고, 한쪽에서는 탱크가 들어오고 있었어요.”
1950년 8월, 소년 김원일은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대구에서 상경, 지금의 남산 ‘문학의 집·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인 필동 언덕길의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온다. 아버지로부터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은 직후였다. 아버지는 인공 치하의 서울에서 지프를 타고 다닐 만큼 고위직이었다. 왕십리 문간방으로 숨어든 식구들은 오지 않는 아버지를 더 이상 기다리기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피난길에서 김원일은 혹독한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기차는 중간에 끊긴 철로를 만들면서 갔기 때문에 가다서다 했어요. 굴 속에 들어갈 때는 기차가 내뿜는 매연 때문에 노인들이 호흡곤란으로 죽기도 했어요. 기차는 한번 서면 언제 갈지 몰랐어요. 정차한 틈을 타 밖으로 나가 변소를 보거나 음식을 구하러 내렸다가 갑자기 기차가 떠나는 바람에 가족을 잃은 사람도 많지요. 배추나 무 뿌리를 주워먹는 것은 예사였어요.”
그는 밀양 굴속에서 멈춰버린 기차에서 뛰어내려 70∼80리 길을 걸었다. 경남 진영읍 친척집에 도착하기까지 굶주린 기억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전후에도 빈곤 속에서 배고픔과 싸웠다. 사지는 가는데 배는 볼록한 체형은 그 후유증이다.
“제가 팔다리는 가는데 배는 굉장히 뚱뚱해요.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 배가 가득 찰 때까지 숟가락을 못 놓게 되다보니 형성된 체형이죠. 하도 밥을 굶주려서 먹는 것에 집착이 생겼어요. 아내가 반찬 위주로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자꾸 밥을 가득 먹어요.”
전쟁은 그를 숫자보다 활자가 가까운 학습 환경으로 이끌었다. “피난을 다니다보니 학교를 못 갔어요. 진영으로 내려와서 학교에 갔더니 이미 다른 학생들은 다 구구단을 뗀 상태였지요. 그때부터 수학에 뒤쳐지기 시작하면서 수학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선생님 몰래 다른 책을 읽어버릇했지요.”
편모 슬하의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신문배달을 시작하면서 그는 글을 읽을 기회가 많아졌다. 신문에 소개된 문고본을 읽게 되면서 문학에 취미를 두게 됐다.
그의 서재에는 직접 그린 전쟁 고아가 울고 있는 그림(사진)이 걸려 있었다. 책상에는 구덩이에 버려진 시체나 피멍이 든 포로가 찍힌 6·25 사진책이 펼쳐져 있었다. 인간을 몽둥이로 때리고 줄지어 죽이고도 무감각한 시대는 형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참혹한 이미지를 자꾸 떠올리며 기억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을 쓸 때마다 이를 앙다물고 견딥니다. 어떤 사명감 때문이지요. 전쟁을 겪은 마지막 세대로서 의무감이지요. 황석영이나 이문열 등 저희 세대 이후는 주위에서 듣고 쓰는 ‘추체험 세대’지요. 저는 전쟁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요. 이 시대의 비극은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의 소설 속에는 서로를 죽이고 피를 흘리는 폭력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후방에서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들의 설움과 한에 천착한다.
“전쟁 자체가 한쪽이 잘하고 다른 한쪽이 잘못한 게 아니라 서로 잘못한거지요. 불쌍하게도 거기서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들이죠. 후방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아요. 당시 한 가족은 5∼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1명만 죽더라도 나머지도 그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거니까 얼마나 참혹합니까.”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아버지는 전쟁통에 연락이 끊겼고, 그의 가족은 외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야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미워했지요. 결손가정을 만들고 빈곤 속에 방치한 무책임한 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문학을 하면서 한국의 현실 자체가 그런 아버지를 만들었고, 당시 마음을 먹은 길로 가신 것뿐이라고 아버지를 이해의 차원에서 보게 됐지요.”
‘불의 제전’ 개정판이 19일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문학을 마무리할 때라는 판단에서 전작들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 작품에서도 한국전쟁을 그린다. “휴전 직후의 시골을 무대로, 전쟁 후 이념 충돌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각박한 민심과 50년대 중반의 시골 풍정을 그려볼 작정입니다. 이제는 사회 일선으로부터 천천히 잊혀져가는 존재로 살아가는 데 만족합니다. 현역으로 남기 위해 애면글면 쓰지는 않을 겁니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