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본전도 못 찾은 主戰論 대신에…

입력 2010-06-14 18:00


“대통령이 진정 북한에 단호하다면 남은 임기에 위업을 이룰 수 있다”

지방선거 다음날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 할머니 셋이 투표소 밖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고 있다.



할머니 1 : 무조건 1번 찍어야 해, 1번.

할머니 2 : 우리 손자가 그러는데 2번 찍어야 전쟁이 안 난다는데?

할머니 1 : 무슨 소리? 2번은 죄다 빨갱이들이야.

할머니 3 : 2번이 빨갱이면 2번 찍어야겠네? 빨갱이를 뽑아놓으면 빨갱이들끼리 전쟁하진 않을 거 아냐?

할머니 2 : 그러게.

젊은 네티즌이 투표하러 갔다가 목격한 일이라는데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선거 결과를 두고 젊은층의 반란이네, 트위터의 힘이네 하며 분석이 요란했다. 그러나 노소를 불문하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말을 아끼는 것 같다. 야당 연합이 선거 막판에 창출한 “1번 전쟁, 2번 평화”라는 구호의 효과는 대단했다. 한 할머니는 “아들이 아파트 산 지 1년도 안 됐는데…”라며 발을 굴렀다.

이명박 정부가 중도실용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하겠다 하니 국민은 실사구리(求利)를 한다. 북한의 어뢰도, 국민의 반전(反戰)도 모두 중도실용에 대한 파산선고다. 투표소 앞 할머니들의 대화는 우리나라를 갈라놓은 좌우 이념대립이 시정(市井)에까지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할머니들은 어릴 적에 6·25전쟁을 경험했을 터. 전쟁 피해와 후유증을 혹독하게 치렀고 ‘빨갱이’가 입에 자연스러운 세대다. 하지만 이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붉은 이념도 관용하게 됐다. 우리 내부의 이념 갈등은 60년 전처럼 다시 상수(常數)가 되었다. 남북 간 문제가 생기면 남한을 먼저 비방하는 종북·친북주의자들이 주위에 늘 있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옳고 도덕적으로 바른 말도 나에게 적용되면 계산법이 달라진다. 영문도 모르고 죽은 천안함 사병들을 영웅으로, 용사로 추도했어도 산 자들이 그들의 희생을 진정으로 보상(報償)하기는 어렵다. 그들을 위해 총을 들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란 이렇게 추상이 아니라 구체다. 국익도 마찬가지다. 국익은 이런저런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경우에는 이것, 저 경우에는 저것이라고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목전인 5월 30일 제주도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할 생각이 없다”고 덧붙이기까지 했어도 그 뜻을 국민에게 전하는 데는 실패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오히려 돋보였다. 대통령이 전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부터 위험했다. 대통령은 그 말을 선전포고를 할 때에만 써야 한다.

실제 전쟁이 가능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60년 전처럼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지원할 이유와 여력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정부가 북진통일을 하자고 하면 국민이 반대할 게 뻔하다. 전쟁은 국민의 이익이 아닌 것이다. “서울 불바다” 협박까지 나오긴 했어도 상정할 수 있는 충돌은 접적 지대에서의 국지전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규정한 탈리오의 법칙은 실은 과잉 보복을 막기 위한 것이다. 천안함 빚은 앞으로 있을 북한 도발에 동해(同害) 보복을 누적시켜 장기적으로 역전승을 거두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전쟁을 피하면서 적의 도발 야욕을 꺾어야 한다.

평화를 구걸할 수는 없는 법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우정을 나누면서 전쟁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고 소련과 동구권을 해체의 길로 이끌었다. 재임 8년 동안 소련의 인권 상황을 비판해 내부 동요를 일으키고 군비경쟁을 유도해 경제력을 말리는 두 가지 방법만으로 역사에 위업을 남겼다. 이 대통령도 남은 임기 중에 그 못잖은 위업을 이룰 수 있다. 천안함 사건 때 보여준 단호함으로 대북 압박을 강화한다면 북한 붕괴를 앞당길 수도 있다. 그러려면 개성공단 인질 사태가 빚어지는 일을 예방하는 조치부터 취해야 한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