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강효백] 중국이 6·25 참전한 진짜 이유
입력 2010-06-14 17:48
우리에게 중국은 진정한 우방인가?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60년이 지나도 씻기 힘든 트라우마(trauma·집단적 상처 또는 정신적 외상),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때문이다.
도대체 중국은 무슨 의도로 6·25에 참전했던 것일까. 사회주의 진영의 수호를 위해서, 소련의 파병종용 때문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지정학적 안보 이익을 위해서 등이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으로 중국의 참전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8년간의 항일전쟁과 4년간의 국공내전을 연이어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신생 정권이 세계 최강 미군을 위시한 16개국 연합군과 맞서, 국가의 존망을 건 모험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합리적 이성적 가치판단의 잣대로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조차도 ‘아주 적다’고 오판했을까.
東北 실세 가오강 역할 중요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 얽힌 진실을 풀기 위해 필자는 가오강(高崗)을 언급하고자 한다. 동북3성의 최고 책임자였던 동북국(東北局) 제1서기 가오강은 공산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숙청된 고위 정치지도자다. 그는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산업화된 동북 지역(만주)을 자기의 독립 왕국으로 변모시키려다가 1954년 발각돼 체포되자 자살했다.
1949년 7월, 류샤오치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가오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동북이 소련의 17번째 공화국으로 편입될 것과 칭다오항에 소련 함대를 파견하고 다롄항의 소련군 병력을 증강해 미국의 위협에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류는 가오를 매국노로 질타하며 그의 발언을 베이징에 보고했다. 하지만 가오는 귀국 후 되레 승승장구했다. 당시 동북의 모든 가정과 공공기관에는 마오쩌둥 대신 스탈린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 외지인에게 동북은 중국보다 소련의 일부처럼 보였다. 가오는 동북인민정부 단독으로 소련 중앙정부와 국제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호기를 부렸다. 중앙정부의 지시를 묵살하기 다반사였던 가오는 베이징의 방문 요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는 대신 선양으로 와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앙정부가 이처럼 방약무인한 가오에게 속수무책이었던 까닭은 당시 여타 지역을 압도하던 동북의 경제력, 군사력과 아울러 그에 대한 소련의 적극적 후원 때문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마오는 비상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중국의 참전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던 정치국 위원들을 설득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패잔병들을 동북으로 퇴각하도록 명령했다. 미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올 것이다. 만약 미군이 동북을 침략한다면 소련은 중·소 군사동맹 조약에 근거해 수십만명의 소련군을 동북에 진주시킬 것이다. 동북까지 이어지는 전란의 도화선을 끊기 위해서는 출병해야만 한다.”
政敵 제거하고 땅 지키는 전략
가오는 “북한은 소련이 책임지는데 왜 중국이 끼어들려고 야단인가”라며 참전반대 의사를 고수했지만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군의 주력부대는 동북 출신 4야전군으로 충당·소모되었고, 병참지원은 가오가 떠맡게 됐다. 풍부하던 동북의 인적, 물적 자원과 막강하던 가오의 권력은 하수구에 물이 빠지듯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급속히 소진됐다. 중국보다 소련의 국익에 부합되는 가오의 친소 행각과 동북의 독자세력화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마오쩌둥의 장남을 포함, 20여만명의 사망자를 낸 한국전에서 중국이 얻은 대가는 무엇일까. 마오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정적을 축출했고, 동북을 소련과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국의 영토로 확보했다. 동북의 오랑캐로써 서양의 오랑캐를 무찌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거둔 전리품이었다. 요컨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의 핵심 의도는 이데올로기 수호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영토 확보를 위한 국가 이익 추구였다. 정적 제거를 위한 권력투쟁의 승리를 곁들인.
강효백 중국인민대법학원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