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1) 캠퍼스 복귀후 공부·신앙성숙 몰두하려했으나…
입력 2010-06-14 21:40
3학년 한 해를 병상에서 보낸 나는 성숙한 신앙인이 돼 캠퍼스로 돌아왔다. 4학년 때부터 기독대학인회(ESF) 요회 목자로 일했다. 내가 서울대를 떠날 때까지 ESF 후배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연구실에 모여 요회를 했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학생복음운동의 한 모퉁이를 담당한 시간이었다. 이를 위해 지금도 고분 분투하는 간사를 비롯해 수고하는 여러 손길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길 기도한다.
나의 대학생활은 낭만과 화려한 젊음을 발산하는 청춘의 황금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팅과 여행, 담배를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은 사치였다. 여행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주로 공부와 신앙생활 2가지 일에만 전념했다. 다행이 하나님이 나에게 학업에 몰입하는 지혜를 주셨다. 그래서 처음부터 졸업까지 단 한 번도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수학은 화학이나 물리 생물과는 달리 기본적인 공리(axiom)위에 자신의 논리를 쌓아가는 추상적인 예술이다. 실험의 데이터나 자연의 현상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논리체계를 구상할 수 있는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주신 인간 이성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1학년 때는 물리, 화학, 통계학과와 같이 수업을 많이 들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나에게 순발력과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창조력을 주셨다. 가끔 평균이 20∼30점대에 머물 때 혼자 만점을 받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 만든 매뉴얼은 친구들이 숙제하고 시험 볼 때 사용하는 자료로 이용됐다. 나는 그런 식으로 친구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왔다. 전공과목 중 나는 특히 위상과 기하에 매력을 느꼈다. 많은 계산이나 기계에 의존하기보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많이 요구하는 듯한 이 학문에 묘한 매력을 느껴 나는 이 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1980년대 중후반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수난의 시대였다. 계속되는 데모와 전경과의 대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연일 행사였고 자신을 불살라 독재에 항거하는 학우들의 죽음은 열사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한 젊음의,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었다. 수업거부와 교수들과의 충돌은 정상적인 교육과 전공분야 공부에 큰 차질을 빚었다. 우리는 정규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학점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때로는 시험까지 거부하며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을 지냈다.
매년 그랬다. 캠퍼스에 꽃은 활짝 피어도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다. 신록과 조락의 계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한겨울이었다. 최루탄에 눈물과 콧물이 마르지 않았고 쫓고 쫓기는 전경과의 싸움판이었다. 아크로폴리스광장은 하루라도 집회가 없는 날이 없었다. 말 그대로 투쟁의 장소였다. 도서관에서 가끔 공부할 때면 공부보다는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리는 집회에서의 어느 학우 또는 노동운동가의 연설을 들으며 지냈다.
삶의 큰 목표와 진리 탐구에 몸 바쳐야할 대학 시절에, 우리는 무력으로 진압하는 공권력과 독재정치 앞에 비참한 정치와 노동현실에 항거하며 살았다. 틈틈이 전공서적과 홀로 씨름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피비린내 나는 정치 투쟁이 없는, 살벌한 이념 투쟁이 아닌, 예술과 신앙과 순수 학문에 자신의 젊음을 바칠 수 있는 더 좋은 시대가 오기를 기도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