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16강] “축구는 살아있는 나무… 한국 ‘바람’을 무력화시켰다”

입력 2010-06-13 18:18

함민복 시인의 그리스전 관전기

찔레꽃 필 때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주 들여다보는 시계의 초침이 발이 되어 툭툭 심장을 차며 내달렸다. 친구 몇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2002년 월드컵을 같이 봤던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감을 누그러뜨려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2004유로 우승팀 그리스 선수들은 장대처럼 커 보였다. 저 큰 숲을 어떻게 헤치고 우리가 골을 넣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던 전반 2분, 카라구니스가 낮게 올린 크로스에 토로시디가 순간적으로 발을 갖다댔다. 골포스트를 살짝 비켜나가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번 위기를 넘긴 후에야 우리 선수들은 경직되었던 몸이 풀리기 시작하는지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표가 얻은 프리킥을 기성룡이 문전으로 올렸다. 그리스 수비수들은 뛰어오르는 박주영에 현혹되어 뒤로 파고드는 이정수를 놓쳤다. 공격수 출신(경희대학 때까지도 센터포드를 보았던)인 이정수가 기다렸다는 듯 확실하게 공을 찼고 상대편 골망이 흔들렸다.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감격이 뒷북을 쳤다. 바로 그때 그리스 팀의 반격. 정성룡 골키퍼가 솟아오르며 문전으로 날아오는 공을 안전한 지역으로 멀리 쳐냈다.

우리 선수들의 조직력이 꿈틀꿈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살아 있는 나무 한 그루 같았다. 나무는 순간순간 모양을 바꾸며 날카로운 전진과 빠른 후퇴를 반복했다. 나무는 뿌리, 몸통, 줄기를 유려하게 휘어 바람을 무력화시키거나 튕겨 오르며 바람의 진영으로 내달리기도 했다. 열한 명 태극전사들이 이심전심으로 그리는 나무는 점점 듬직하게 TV 화면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영표를 중심축으로 한 뿌리들은 견고했다. 이영표는 큰 경기를 통해 축적된 그의 경험을 백분 살려 뿌리의 위치를 잘 조율했다. 동작에 여유마저 넘치는 그는 위기의 순간마다 해결사로 뛰어들었다. 마치 홍명보가 그랬던 것처럼.

박지성이 이끄는 나무 기둥은 억척스러웠다. 뿌리의 힘을 가지에 잘 전달했고 뿌리가 당할 위험을 가지들이 막아주도록 선도하기도 했다. 박주영은 거미처럼 공간을 재단하며 공격 루트를 개척했다. 그의 공간 패스는 하도 날카로워 바라보다 시선을 베일 뻔했다.

박주영 염기훈 나뭇가지는 최일선에서 승리를 위해 끝까지 발버둥쳤다. 그러나 골을 넣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었다. 박지성의 공간패스를 받아 골키퍼와 일대일이 되었던 상황과 차두리의 정확한 크로스를 놓친 건 너무나 애석했다. 그렇지만 그의 위치 선정 능력은 뛰어났다. 그가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에 감을 잡으면 앞으로 경기에서는 찬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품어보았다.

후반 박지성의 골, 2010년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득점왕 케카스의 슛을 막아낸 정성룡, 아낌없이 몸을 날리는 조용형의 수비 등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는 승리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웠다.

축구는 살아 있는 나무다. 열한 명이 합심으로 그리는, 조직력이 생명인 나무다. 아니, 우리 겨레가 온 마음으로 그리는 나무다. 6월 12일 그리스전은 어떤 바람이라도 극복하고 더 튼튼한 나무가 되리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한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