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기자의 남아공 편지] 그리스는 초상집이었습니다

입력 2010-06-13 20:28


12일 한국-그리스전 장소인 남아공 포트엘리자베스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전후해 그리스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스 기자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의기양양했습니다. 2004 유로 우승팀(그리스)이 아시아 축구(한국)에 지기야 하겠느냐는 표정들이었습니다. 흡연이 금지된 경기장 기자석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그리스 모 신문기자도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배정된 한국 기자석 자리에 있지 않고, 일부러 그리스 기자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경기를 봤습니다.

전반 7분 이정수의 선제골이 나오자 그리스 기자들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스 기자들은 역전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바로 앞자리엔 그리스 방송사 사람들이 있었는데 후반 시작과 함께 양팔로 지휘자 버금가는 큰 동작을 해가며 흥분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그리스 기자에게 ‘그리스 말인 것 같은데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레하겔 감독이 지금 (세트피스 프리킥을 전담하는) 카라구니스를 뺐는데 골이 절실한 상황에서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몇 분 뒤인 후반 7분 박지성이 그리스의 패스 미스를 낚아채 골로 연결시키자 그리스 기자석은 고요해졌습니다. 그리스는 자멸하고 있었습니다.

오토 레하겔(72) 그리스 대표팀 감독의 내외신 기자회견장 분위기는 더 험악했습니다. 기자회견 중간쯤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그리스 기자가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와의) 2, 3차전은 더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짐 쌀 준비가 됐느냐”는 조롱조에 가까운 질문을 했습니다.

레하겔 감독은 “그 정도는 아니다. 아직 다른 경기는 시작 안 했으므로 미리 얘기할 필요는 없다”며 짜증스럽게 반응했습니다. 레하겔은 “(이정수의 선제골 장면에서) 우리 수비수들이 헤딩을 안 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상황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선수 탓을 하는 듯한 발언도 했습니다.

한국 역시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네덜란드에 0대 5로 참패했던 악몽이 있어 그리스 기자들에게 더는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포트엘리자베스=이용훈 기자 co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