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끝나지 않은 전쟁] 당시 포병 중위 김운한씨가 겪은 ‘춘천전투’

입력 2010-06-13 21:21


(2) 그날의 격전지를 가다

“포병 전력 1대 5… 열세 딛고 북한군 예봉 꺾어”

노병(老兵)은 그동안 강원도 춘천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1950년 6월 이후 다시 춘천을 찾은 것은 꼭 60년 만이었다. 지난 8일 춘천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노병은 중절모를 고쳐 쓰며 말했다. “6·25가 환갑이 됐고, 나도 아흔이 다 돼가니… 이제는 가도 되겠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노병의 이름은 김운한. 1922년생이다. 50년에는 육군 16포병대대 중위였다. 76년 육군 제1군단 부군단장(소장)으로 예편한 김 전 소장은 비극적인 전쟁이 시작되던 그날 춘천에 있었다. ‘춘천전투’ ‘춘천대첩’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된 그 전투 현장에서 그는 16포병대대 3포대의 사격을 지휘했다. 당시 군수장교였지만 재교육을 받기 위해 부대를 비운 장교들이 많아 작전장교 임무도 맡았다. 16포병대대는 38선을 넘어 춘천시내로 유유히 진격하려는 북한군의 예봉을 꺾었다.

김 전 소장은 춘천전투 전사에서 16포병대대의 역할이 주목받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그는 “포병이 선전하는 동안 고지를 점령한 제7연대 보병들의 공적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전사를 기록할 때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남을 깎아내리는 ‘진영논리’가 팽배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우리는 포병이 대대 하나인데, 그들(북한군)은 4개 보병 연대에 1개 포병 연대가 더 지원하고… 당시 국군과 인민군의 비율은 보병 1대 5, 포병 1대 5, 대전차포 1대 9 정도로 우리가 열세였어.”

북한군은 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보슬비와 함께 공격했다. 비상연락을 받은 것은 그날 오전 5시였다. 북한군은 38선에 배치된 국군의 배치를 전부 알고 있었다. 국군은 12개 소대만이 춘천 북쪽 동부전선 48㎞를 방어하고 있었다. 휴일이어서 1개 소대 20여명이 평균 4㎞씩을 막아야 했다.

“우리 군은 당시 부대원의 3분의 1을 주말이면 외박을 보냈어. 쌀이 없어서, 먹을 게 없어서 내보낸 거야. 3분의 1이 외박을 나가고, 남은 사람의 3분의 1을 또 외출시켜 전체 소대원 40명 중 20명씩만 남았지. 전쟁이 안 돼. 왜 솔직하게 기록을 못 남기나? 뭐가 부끄럽나?” 울분을 토하는 노병의 눈빛이 형형했다.

김 전 소장은 “우리 전사에는 유격전을 펼치며 대응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퇴각했다고 썼지만 그건 정확한 사실이 아니야.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알려야 해”라고 말했다.

최전방에 배치돼 있는 국군은 중화기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김 전 소장에 따르면 당시 국군은 최전방 군인들이 중화기를 가지고 월북할 것을 우려해 박격포와 기관총, 대전차포 등을 춘천시내 후방에 배치한 상태였다. 연대본부에 중화기를 쇠사슬로 묶고 열쇠로 채워 뒀다.

◇하늘이 도운 전투=까마득한 선배가 춘천에 온다는 소식에 제2포병여단 소속 장교들이 김 전 소장을 맞으러 소양2교 건너편 육군회관에 나와 있었다. 든든한 후배들을 만나자 김 전 소장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는 “내가 전투했던 곳을 둘러보고 싶다”며 품에서 꼬깃꼬깃 접힌 2절지 크기의 지도를 꺼냈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옛날 지도를 복사해 이어 붙인 것이라고 했다. 싸리고개, 164고지, 여우고개…. 지도의 지명은 예전 것이었다.

김 전 소장이 짚는 곳을 현역 군인들은 잘 알지 못했다. “싸리고개가 어디지?” “60년이나 지나서….” “공부를 좀 하고 왔다면 좋았을 텐데요.” 군인들은 난감해하며 김 전 소장의 기억에 의지해 차를 몰았다.

현재의 춘천시 우두동에 이르자 김 전 소장은 “바로 이곳에 포탄이 떨어졌다”며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들판을 가리켰다. 60년 전 3시간 동안 포탄 5000여발이 집중됐다는 보리밭은 푸르기만 했다. 국군이 105㎜ M3 대포 12문의 달궈진 포신에 찬물을 끼얹어가며 1분에 2.5발꼴로 사격했던 곳이었다.

김 전 소장은 “무모하고, 무식하고, 무지하게 싸웠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이겼다”며 “우연적인 승리였다”고 말했다. 당시 16포병대대는 적의 사거리도 모른 채 적을 향해 북진했다. 춘천시가지 북쪽에 만들어둔 포진지에 들어가기 위해 재래식 M3포를 끌고 진군하던 포병들은 북한군을 발견하고 급히 되돌아왔다. 황급히 돌아와 방열(포를 좌우로 늘여 세움)한 곳은 현재 춘천시 신북읍 신북파출소가 있는 자리였다.

북한군은 38선을 쉽게 돌파한 뒤 무심코 행군 대형을 이루고 춘천에 접어들고 있었다. 김 전 소장은 지체 없이 포격명령을 내렸다. 그는 “3무와 3급의 전투였지만, 세 가지의 이로움도 얻었다”며 “그걸 전운(戰運)이라고 하는 모양”이라고 했다.

무모하게 적의 사거리를 모르고 전진했고, 무지하게 벌판에 포진을 벌였고, 무식하게 포격을 했다는 것이 ‘3무’였다. 급히 전진했고, 급히 방열했고, 급히 포격했던 것이 ‘3급’이었다. 북한군 2개 대대가 전투력을 잃고 무너졌고, 그 틈을 타 아군 보병대대가 164고지를 점령했으며, 북한 지휘부가 퇴각했다는 것이 세 가지 이로움이었다. 춘천과 가평을 지나 서울로 직행하려던 북한군은 의외의 저항에 사흘간 춘천 북쪽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진영논리는 그만, 종합적인 전사 써야=이야기를 마친 김 전 소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내가 있던 전장에서만 싸웠고, 그것만 보고 기억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연히 만들어진 승전을 대첩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국가의 전사를 참고해 종합적인 전사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적지 답사에 동행한 후배 군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업무를 담당하는 2포병여단 소속 홍인구 원사는 “포대가 싸운 자리가 경사진 곳이 아니라 개활지라는 점이 늘 궁금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해 들으니 이제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노병은 단호히 말했다. “내가 이제는 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길 거야. 그게 벌써 60년이 된 일이니까, 이제는 쓸 수 있고, 써야 해.” 김 전 소장의 기록 작업은 “춘천으로 진군하던 북한군이 포병의 타격을 입어 퇴각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옛 소련의 군인 라즈바예프의 보고서가 2001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의해 번역 출판되면서 더욱 빨라지고 있다.

그는 아흔이 되기 전까지 16포병대대의 족적을 제대로 밝히는 작업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춘천=이경원 이용상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