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아버지의 사과
입력 2010-06-13 19:18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장을 보러 갔다.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음식으로 상을 차리리라 마음 먹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아버지가 “맛있다” 하시던 음식은 왜 이리 값 싸고 흔한 것들뿐인지, 가슴이 먹먹해 왔다. 사과, 찐 고구마와 옥수수, 가지볶음. 이 외의 음식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간단한 음식이나마 내 손으로 조리해 드린 적이 있던가.
아버지 임종 직전, 나는 사과 주스 한 숟갈을 입안에 흘려드렸을 뿐이다. 세상에 수많은 과일이 있건만 아버지는 물리지도 않는지 사과만 좋아하셨다. 임종이 가까웠다는 의사 말을 듣고 사과 주스를 생각해낸 내가 기특했다. 그만큼 아버지와 사과는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아버지는 주스를 넘기지 못하셨다. 나는 야윈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딸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꼭 아버지 딸로 태어날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나의 울음 섞인 약속을 들으며 서서히 혼을 거두시며 손을 놓으셨다. 사과 주스 때문에 기도가 막혀 돌아가신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사과 주스를 드린 건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라고, 지금도 그리 생각한다.
10여년 전, 여행 갔다 오는 길에 도로변 트럭에서 사과를 싸게 팔기에 한 자루 사다 드린 적이 있다. 내가 번 돈으로 사과를 사드린 건 그게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효도의 기쁨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헌데 며칠 후 어머니가 “어떻게 그런 사과를 사다 드릴 수 있느냐”며 나무라셨다. 제대로 익지 않은 낙과에 썩은 게 반이었단다. 주스로도 갈아 먹지 못할 만큼 맛없는 사과라고, 내다 버리라는 어머니 말에 큰 딸이 사다 준 거라며 알뜰하게 발라 드셨단다.
설거지 때 젓가락만 서너 뭉치일 만큼 대지주 집안이었고, 그래서 공산당에게 알몸으로 쫓겨나는 바람에 제대로 못 먹어 키가 크지 못했다며 조용히 웃으시던 아버지. 통일 되면 찾을 거라며 땅 문서와 약도들을 소중히 간직하셨건만, 나는 그 서류를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봐드리지 않았다. 무인도 등대지기를 해도 될 만큼 성실했고, 병상에서도 간병인이 드세 무섭다며 바꿔달라고 애원할만큼 마음이 여렸다. 못난 자식들이 병원비 걱정할까봐, 딱 삼 개월 앓고 돌아가셨다.
아버지 기일 때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좋은 세상에서 사과 맘껏 자시지요? 저희들 잘되도록 돌봐주셔야 해요.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 딸로 태어나겠다는 약속 그대로예요.” 올해 나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기도 드렸다. “아버지, 평생 자식 땜에 애 끓이셨는데, 저 세상에선 저희 걱정 마시고 자유롭게 사세요. 저희는 저희 능력 안에서 열심히, 성실히 살게요. 다음 세상에서 저 같은 불효자식과 연을 맺고 싶지 않으시면 그렇다 말해주세요. 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버지 기일 잊지 않고 비싸고 좋은 사과 사드릴게요. 더 이상 짐을 지지 마셔요. 아버진 최선을 다하셨어요.”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