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19) 백제가 일본에 건넨 칠지도 2

입력 2010-06-13 17:48


백제가 倭에 하사한 칼이지만 일본에선 진상품이라 억지 주장

홍순주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장이 지난 5월 17일자 ‘문화재 속으로-백제가 일본에 건넨 칠지도’ 편 기사를 읽고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인즉 일본이 당시 국가로 형성되기 이전이니 칠지도를 바친 것이 아니라 하사한 것이라는 겁니다.

배용준 주역의 역사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자신이 쓴 글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타난 역사’와 시나리오 ‘천신의 사자 광개토태왕’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제작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던 홍 회장은 칠지도가 건네진 4세기 백제와 왜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칠지도가 제작된 369년 왜 열도에는 온조계 근초고왕(백제 13대 왕) 세력에게 정치적 왕권을 빼앗긴 비류계 계왕(12대 왕)의 후손인 진정(근초고왕 당시 조정좌평) 세력이 도피해 겨우 한 무리를 이루는 집단조직이 있었을 뿐, 백제와 관련이 전혀 없는 별도의 민족이 세운 독립된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근초고왕은 비류계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왜 열도에 근구수왕(14대 왕)의 아들을 보내 왜 후왕으로 삼아 통치케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권한을 상징하는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겁니다. 길이 75㎝로 몸체 양 옆에 각각 3개의 칼날이 붙어있는 칠지도(사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의 보물이었습니다.

1873년 공개된 칠지도에는 앞면 34자, 뒷면 2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죠. 이 중 7자는 마모가 심해 전혀 알아볼 수 없어 한·일 양국이 각기 해석을 달리하며 논란의 핵심이었죠. 홍 회장은 당시 왜 열도가 근초고왕의 손자에 의해 다스려졌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칠지도 명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앞면=‘泰(和)四年 (正)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鐵七支刀生?白兵 宜供倭侯王 (百)(濟)(王)(句)作’(태화 사년(369년) 정월 십육일 병오일 정오, 백번이나 두들긴 철로 만든 칠지도는 백병을 물리칠 수 있어 마땅히 왜 후왕에게 주려고 백제왕구(근초고왕)가 제작하였다)

뒷면=‘先世以來末有此刀百慈王世(子) 寄生聖音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선세 이래로 이런 칼이 있은 적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근구수 태자)가 뜻밖에 아들이 탄생하는 소리가 있었기에 그를 왜 후왕으로 세우기 위해 이 칼을 만드노니 후세에 길이 전하라)

그러나 일본학자들은 앞면 첫 글자 ‘泰’를 중국 황제의 연호를 끌어들여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와 연결시킵니다. 신공황후가 포상8국의 난을 일으켜 한반도 남부를 쳐서 장악하니 백제왕이 칠지도를 헌상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백제왕이 중국의 연호를 쓰는 제후급 왕이었다면 왜왕을 후왕으로 부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홍 회장은 설명합니다.

칠지도는 369년 왜 후왕에게 준 형(兄) 칠지도와 372년 두 번째 만들어 준 제(第) 칠지도가 있습니다. 국내 학계에서는 두 자루 모두 백제가 일본에 건넨 하사품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는 홍 회장뿐 아니라 모든 국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문화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