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태형] 아들의 뒷모습
입력 2010-06-11 17:39
업무차 방문한 싱가포르에서 한 분의 한국인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선교사로부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다. 싱가포르에 10년 남짓 살았던 이 선교사는 지난해 안식년 동안 아들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30여일 동안 800㎞에 달하는 길을 아들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이 선교사의 아들은 소위 ‘문제아’다. 싱가포르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들은 현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홀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도 학교생활을 지속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학교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선언한 뒤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들에 대한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선교사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분노와 절망감을 갖고 이 선교사는 아들에게 산티아고행을 제안했다. 아들이 머뭇거리며 받아들였다. 부자는 길을 떠났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표시하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하나, 둘 정리되는 것이 있었다. 내려놓지 못했던, 버리지 못했던 무수한 것들이 생각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부자는 며칠 동안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걸었다. 아들이 앞서 나갔다. 그 뒤를 아버지가 따랐다. 너무 힘들어 오직 걷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때 아버지는 문득 앞서 걷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뒷모습. 아,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아들의 내면을 깊숙하게 보았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정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녀석의 고민과 좌절을 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들 그 자체를 보지 못했던 지난날을 회개했다.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아들에게 투영하려 했던 것을 통탄했다. 오직, 아들 그 자체만을 사랑하게 됐다.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분은 불량품과 같은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거둬주신 하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세상은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던가.
지금 아들은 댄스 연습소에서 교습생으로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선택한 일이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산티아고 길, 그 길은 아들과의 화해의 길이었다.
이태형 i미션라이프부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