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整風
입력 2010-06-10 18:36
국민당군의 총공세에 밀려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겨우 근거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파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유소(留蘇)파 간 알력이 심했다. 양측은 장정(長征) 후 새로 입당한 당원들의 교육 목표를 놓고 대립했다. 소련 유학파가 주축인 유소파는 레닌의 교조주의적 입장에서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한 반면 마오파는 소련 지령에 무조건 따라선 안 된다고 맞섰다.
마오는 당원 교육, 당 조직 정돈, 당 기풍 쇄신을 강력 요구했다. 학풍(學風) 당풍(黨風) 문풍(文風)을 새롭게 하자는 삼풍정돈(三風整頓)이다. 선거가 끝나면 진 쪽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제기하는 정풍은 여기서 유래했다. 마오는 정풍을 반대파를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1943년 공산당 사무국과 정치국 주석직에 올라 당권을 장악한 그는 정풍운동을 일으켜 눈엣가시 유소파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마오는 수차례 정풍을 주도했다. 1957년에는 “무엇이든 말하라. 말하는 자에게는 허물이 없고, 듣는 자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는다”는 요지의 정풍운동 지시를 내렸다. 곳곳에서 불만과 비판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자 마오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반우파운동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이로 인해 마오가 야심차게 추진한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펑더화이(彭德懷) 국방부장이 숙청되고, 멋모르고 정풍에 뛰어들었던 50여만명이 투옥되거나 직위를 잃었다.
중국에선 사라진 정풍이 한국에선 정치적 변화기 때마다 어김없이 휘몰아친다. 서울의 봄 당시 김종필 총재를 몰아내려던 공화당 소장파의 정풍, 2001년 권력 2인자 권노갑을 겨냥한 정동영 의원의 정풍, 2007년 대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 초선의원들의 정풍, 2008년 대통령 형 이상득 의원의 2선 후퇴를 목표로 한 한나라당 소장파의 정풍 등등.
시작은 거창했으나 이 같은 정풍운동은 2001년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예외 없이 사미(蛇尾)로 끝났다.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바가 달랐고, ‘내 탓’은 무시하고 ‘네 탓’ 타령에만 몰두한 까닭이다. 더구나 동기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정풍을 이끌 리더십마저 허약해 기득권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지방선거에서 완패한 한나라당 초·재선 의원들이 세대교체,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 쇄신, 계파 해체 등 정풍 수준의 여권 쇄신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번엔 무라도 썰려나.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