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김명호] ‘천안함 계산서’

입력 2010-06-10 18:36


아니길 바랐지만, 천안함 사건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을 때, 북한 소행임을 전제로 언뜻 이 문제가 동북아 안보구도를 과거로 되돌려놓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미국과 중국의 안보 이익이 한반도에서 충돌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럴 경우 낭패를 보는 쪽은 한국이다. 막대한 ‘안보 코스트(비용)’가 들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천안함 사건은 미·중이 동북아 안보에서 대립적 구도를 보이고,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의 편에 가담하는 양상이 됐다. 고전적인 ‘한·미·일 대(對) 북·중·러’ 대립적 안보구도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물밑에서 꿈틀대던 이런 조짐은 지난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국의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 방중 거부가 그것이다. 게이츠 국방장관은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중국 방문을 희망했었다. 하지만 중국은 공개적으로 퇴짜를 놓았다. 미국은 당혹스러워했다. 한·미가 강력히 추진해 왔던 서해에서의 대규모 연합훈련은 연기됐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미국의 천안함 대응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서해상에서의 한·미 대규모 군사훈련, 특히 ‘미국 핵항공모함의 서해 진입’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서해를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근래 들어 미국은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중국은 미국의 항모 배치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결국 중국은 관영 환구시보의 사설(9일자)을 통해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항공모함이 서해에서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중국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이는 중국인을 분노케 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중국이 발끈한 것은 단지 한반도에서 안보 이익이 침해됐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복합적이다. 대만 무기 판매에서부터 환율 절상이나 탄소 배출, 이란 제재 동참 등 다방면에서의 미국의 압력과 무관치 않다.

그동안 비교적 한국과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던 러시아도 천안함 문제에선 선을 긋는 분위기다. 러시아 관영 인테르팍스 통신은 방한 러시아 조사단의 귀국 이후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는 불충분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 나라 언론의 성격상 정부 입장으로 봐도 무방하다.

반면 그간 미국과 불편한 관계였던 일본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입장을 일찌감치 정했다. 총리 교체 이후 미·일 관계는 전통적인 최우선 동맹관계로 복원될 분위기다. 이제 천안함 사태는 단순한 남북 간 정전협정 위반문제로,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는 국내적 시각으로 풀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물론이고 주변 4강은 각자 안보 계산서를 손에 쥐고, 어떻게 하면 앞으로 더 이익이 남을까를 최우선 목표로 머리를 쓰고 있다.

한·미 동맹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의 언동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하지만 중국이 개입하고, 관련국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이 감안된다면, 한·미의 안보 이익이 꼭 일치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지금도 매일 미 국무부와 국방부 관계자 입을 통해 한국 정부의 입맛에 딱 맞는 천안함 관련 언급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다. 워싱턴에서는 미국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한 발 빼기 시작했다는 전망들도 나온다. 유엔 안보리 논의 과정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정부의 의지와는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고, 주변 열강들이 적절히 타협할 수도 있다. 국제정치판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의 안보 계산서이다. 말로만 북한을 응징하고, 강경하게 발언하는 건 국내용이다. 안보리의 결의나 의장성명은 사실상 말의 성찬으로 끝날 수 있다. 우리 계산서엔 한반도 상황에 최적화된 미국의 방위력 제공이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 북한이 두려워할 제재와 이후 대북 전략 및 남북관계 등과 같은 실리 항목이 구체적으로 포함돼야 한다.

워싱턴=김명호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