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직방세계와 월드컵

입력 2010-06-10 18:00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시 의뢰로 자원봉사자 교육을 맡은 일이 있었다. 교육 대상은 외국인 응원단에게 방 한칸 내줄 작정을 한 중년 주부들이었다. 홈스테이 봉사를 자원한 동기를 물어봤다. 한 분이 “아이들에게 영어 배울 기회를 주고, 글로벌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답했다. 주변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세네갈이나 카메룬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어쩌죠?” 순간 강의실 공기는 냉랭해졌다.

많은 한국인은 세계가 마치 미국과 유럽으로만 이뤄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들 나라의 언어 문화 습속 지리에 대해서는 세세한 것까지 배우려 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국인이나 유럽인과는 어떻게든 사귀어 보려 하는 이들도 아시아나 아프리카인과는 부러 거리를 둔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지만 기억이 집중되는 ‘시간대’는 따로 있다. 한국인은 조선시대 세종이나 정조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대충이라도 알지만, 인종이나 명종 때 일은 잘 모른다.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봐도 추억거리가 밀집한 시간대가 있는가 하면 기억 속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간대도 있다. 가까운 과거의 일이라 해서 더 많이, 더 잘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방금 겪은 듯 생생한 오래 전 일이 있는가 하면, 어제 겪은 일이 잘 기억나지 않을 때도 많다. 기억은 경험과 관심의 밀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지구상 200개가 넘는 나라 이름을 다 외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북아메리카 지도 위에는 도시 위치까지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사람도, 유럽 지도 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국경선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사람도, 다른 지역 지도를 주면 어디에 어떤 나라 이름을 써넣어야 할지 막막해한다.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있는 세계지도는 깨알 같은 글씨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영역과 몇 개 안 되는 글자가 듬성듬성 박혀 있는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지금껏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는 1400년쯤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다. 100여개 유럽 지명과 35개 아프리카 지명이 담겨 있어 그 무렵의 지도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지도는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 것일 뿐 실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에 조선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한 정도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지리 정보가 입수됐지만 그 정보는 중화사상을 조금도 흔들지 못했다.

중국 고대의 주나라에는 직방씨(職方氏)라는 관원(官員)이 있었다. 주 임무는 주변 제후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일이었는데, 지도 제작도 그의 책임이었다. 그는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지역만 상세히 그려 넣고 그 밖은 생략하거나 소략해 그렸는데, 그의 지도에 그려진 세계를 ‘직방세계’라 했다. 이는 지도에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세계, 즉 ‘중화세계’나 ‘문명세계’와 동의어가 됐다.

오늘날 세계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정교하고 정확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계를 보는 눈이 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아졌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우리 의식 속의 세계지도는 여전히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흡사하다. 지식과 정보의 양에 따라 세계지도를 압축한다면 동북아시아 북아메리카 남서유럽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세계화가 시대의 화두가 된 지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는 늘 ‘미국화’와 혼동된다. 세계화는 한국 문화를 세계적 표준의 하나로 올려 세우는 것이지, 미국식으로 개조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미국인과 유럽인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 대해 알려고 애썼다. 세계에 대한 영향력은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내 나라를 알리고 싶다면 먼저 다른 나라를 알아야 한다.

마침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참에 세계지도를 펴놓고 참가국과 그 주변 나라에 대해 좀더 알려는 의지를 가져 보자. 우리 의식 속의 뒤틀린 세계지도를 활짝 펴보면 세계가 얼마나 넓고 다채로운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