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구호선 탔던 한국계 이아라 리, 피격상황 첫 증언 “이스라엘군 총에 빗자루로 맞섰다”

입력 2010-06-10 18:04


유선전화 너머로 ‘footage’ ‘screening’ 같은 영어단어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잠시 대기시킨 채 제3자와의 대화는 휴대전화로 계속됐다. 차분했지만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전 세계 언론과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 관계자가 그녀를 찾고 있었다. 목격자, 증인, 피해자, 범법자? 무엇으로도 불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통화가 끝난 시각은 밤 11시30분. 그녀에게는 또 다른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 화가, 사진작가이며 국제 인권운동가이기도 한 이아라 리(Iara Lee·44·사진)씨. 브라질로 이민한 한국인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브라질인이다. 그녀는 지난달 31일 지중해에서 이스라엘군 특공대의 공격을 받은 국제 구호선박 6척 중 ‘마비 마르마라’에 타고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9명은 모두 이 배를 탔다.

구호선단의 목적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였다. 육로와 하늘길, 뱃길까지 막은 이스라엘의 봉쇄가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지구상 가장 거대한 감옥이다. 전 세계 37개국에서 모인 평화운동가, 소설가, 저널리스트 등 663명은 구호품을 가득 실은 선박을 타고 그 견고한 장막을 뚫어보려 했다. 지중해 어둠 속에서 민간인 9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담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억류됐다가 추방돼 미국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싸움은 다시 시작됐다.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야 했다. 그녀를 8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주위는 완전히 깜깜했다(사건은 현지시간 오전 4∼5시쯤 벌어졌다). 멀리 이스라엘군 선박 불빛을 봤다. 머리 위에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이스라엘 특공대원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경악했다. 대치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어둠 속에서, 그것도 공해(公海)에서 공격할 줄은 몰랐다. 그들은 먼저 위성통신을 차단했다. (구호선이) 외부세계와 단절된 걸 확인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 처음에는 공포탄을 사용하거나 실탄을 쓰더라도 다리를 겨냥할 줄 알았다. 겁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바로 쏘았다.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 같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승객이 총과 칼을 휘두르며 먼저 폭력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것이다.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잡고 휘둘렀다.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의자, 빗자루, 막대기, 체인 뭐든 상관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중무장한 저격수들이었다. 레이저조준기 불빛이 배 바닥에 떠다녔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곤봉을 휘둘렀고, 그들은 실탄과 첨단무기로 무장했다. 우리 배는 마치 소말리아 해적선처럼 잔혹하고 악랄하게 진압됐다. 그건 대학살(carnage)이었다.”

-투입된 병력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군인이 얼마나 있었는지 잘 모른다. 고무보트가 여러 척이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모든 게 흐릿하다. 당시 상황은 마구 뒤엉켜 혼돈이었다. 갑판 위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총성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바닥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총에 맞은 사람들이 바닥에서 피를 흘렸다. 우리들은 ‘민간인이다. 쏘지 말라’고 외쳤다. 그들은 무시했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달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거부했다. 사망자 9명에게서 총탄 30발이 발견됐다고 한다(터키 언론은 사망자 중 한 명이 1m 앞에서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고 보도했다. 나머지 8명은 1인당 평균 3∼4발씩 맞았다).”

-전체 과정을 다 지켜봤나.

“갑판에 있다가 (총격이 시작되고 얼마 뒤) 아래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여자들은 대부분 아래로 피신했다. 잠시 후 카메라맨이 걱정돼서 위쪽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닥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메가폰 소리가 났다. ‘움직이지 마라. 배가 장악됐다.’ 이런 내용이었다. 상황이 끝나는 데 1시간쯤 걸린 것 같다. 모두에게 수갑이 채워졌고 갑판으로 끌려갔다. 헬리콥터가 사상자를 실어갔다.”

-목숨을 걸고 가자지구에 가려던 이유는 무엇인가.

“의료품과 식량, 건축자재를 가자에 전달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는 비인도적일 뿐만 아니라 불법이다. 제네바협정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하마스(팔레스타인 강경 무장 정치조직)가 밉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가자의 민간인 전체를 벌주고 있다. 가자를 통치하고 있는 하마스는 2006년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집권한 정당이다. 이스라엘은 수시로 가자를 폭격하고, 민간인을 죽이고, 정치지도자를 암살한다(지난 1월 두바이의 하마스 간부 암살사건 배후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로 드러났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침묵했다. (이스라엘은) 활동가 몇 사람쯤 죽여도 괜찮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거다. 이런 상황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가자지구 상황은 어떤가.

“지난해 12월 이집트 정부의 허가를 받고 가자를 돌아봤다. 당시 평화운동가 1300명이 가자와 이집트의 국경인 라파 개방을 요구하며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집트 정부는 100명에게 3일간 가자 입국을 허락했다. 짧지만 참혹한 도시를 확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봤다. 도로 다리 같은 사회기반시설은 다 무너졌다. 마실 물을 구할 수 없고, 하수시설도 전부 파괴됐다. 150만명의 가자 주민은 고립된 채 죽어가고 있다.”

-추방 직후 이스라엘군의 총격 장면을 담은 비공개 영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어떤 내용이고 언제 공개하나.

“이스라엘군은 배를 접수한 뒤 카메라, 컴퓨터 등을 몰수했다. 그 중 하나를 숨겨 나오는 데 성공했다. 동승한 터키방송국 기자가 찍은 1시간짜리 동영상을 담은 작은 칩이다. 세상은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9일 오후(현지시간) 유엔 관계자들 앞에서 상영한 뒤 DVD로 제작해 주말에 공개할 계획이다(상영은 예정대로 이뤄졌다). 사망자가 몇 명인지, 얼마나 실종됐는지, 이스라엘에 억류된 채 풀려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은 질문이 남아 있다. 국제사회가 나서서 조사해야 한다.”

-이미 이스라엘은 유엔의 국제적 조사 요청을 거부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세계가 지켜봐야 한다.”

-가자지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3년 이라크전이 전환점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반전시위가 있었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고 폭격을 개시했다. 뉴욕타임스, 폭스TV가 전하는 정보 말고 다른 걸 알고 싶었다. 레바논에 1년, 이란에 1년 살았다. 튀니지에서도 잠깐 살았다. 주류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는 거대한 거짓말이자 조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레바논에서 전쟁(200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와 치른 34일간의 전쟁)을 처음 경험했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눈앞에서 공항이 무너졌다. 분노했다. 이스라엘의 일방적 공세에 세계는 그저 TV나 볼 뿐이었다. 이란 민간인은 내부적으로는 독재체제에, 외부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위협에 시달린다. 안팎으로 짓눌렸다.”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한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 유목민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곳에 가되 관광객이 되고 싶지는 않다. 어디서든 낯선 언어, 문화에 동화되려고 애썼다. 물론 힘들다. 친구도 집도 없고 말도 안 통한다. 버스를 탈 수도, 물건을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새 세상은 그렇게 배워나가는 거다. 보상은 크다. 고통 없이 얻는 건 없다.”

-가족은 걱정하지 않나.

“어머니는 내 삶의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서 별로 충격을 안 받는다. 전화를 걸면 ‘너, 아직 살아있구나’ 하신다(웃음). ‘불장난 하면 다친다.’ 가끔 그런 얘기만 한다. 뉴욕에 거주하는 여동생 둘이 있는데 한 명은 패션 디자이너이고, 다른 한 명은 브라질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둘 다 내 방식을 인정한다. 어떤 이는 좋은 집과 옷에 관심이 있다. 나는 관심이 없다. 내겐 사회정의가 중요하다. 그뿐이다.”

-아티스트와 인권운동가, 어느 정체성이 우선인가(그녀는 1984∼89년 브라질 상파울루국제영화제 프로듀서로 일했다. 89년 뉴욕 이주 후 복합예술 제작사 ‘카이피리냐 프로덕션’을 세웠다. 95년 ‘인조 쾌락(Synthetic Pleasure)’으로 미국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믿지 않는다. 예술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매우 훌륭한 방법이다. 사회운동과 예술은 멋진 조합이다. 정치적 분석은 건조해서 감성에 호소하지 못한다. 영상, 사진, 음악, 춤으로 마음을 두드리고자 한다.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때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두 나라 사이에 예술로 다리를 놓고 싶었다. 하지만 본분은 아티스트로서의 작업이다. 본질적으로 나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