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에든버러 존 로스의 무덤 앞에서
입력 2010-06-10 16:57
[미션라이프] 영국 에든버러 달케이트 거리 뉴윙턴 묘지공원. 이곳엔 135년 전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은 존 로스 선교사(1842~1915)의 무덤이 있다. 그가 번역한 ‘예슈셩교젼셔’(1887)는 한국 개신교 형성기 한국 민중들로 하여금 급속도로 복음을 접하게 했다. 교회사학자들은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100년 빨리 한국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적은 것은 결정적으로 성경을 빨리 보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정도다. 그만큼 우리말 성경의 위력이 대단했다는 말이다.
묘지공원에 들어서자 울창한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솔길을 따라 수백 개, 아니 1000개는 족히 될 법한 비석들이 축구장 20개 크기의 묘지공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난감했다. 도움을 받기로 한 목회자마저 사정상 어렵다며 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로스 선교사의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아보였다. ‘한국교회에 절대적 도움을 준 선구자의 무덤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 없다니….’ 모든 게 다 신앙 후배들의 역사의식이 부족한 탓이었다.
5분간 오솔길을 따라 비석을 찾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입구로 다시 돌아와 관리사무소처럼 보이는 허름한 주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50대 중년 여성이 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존 로스 선교사의 무덤을 찾고 있습니다.” “아, 한국에서 오셨군요. 찾는 데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전 마카이(55·여)씨는 이곳에서 30년간 살았다고 했다. 그녀는 “이곳이 40에이커(16만1800여㎡, 4만9000여평) 정도 될 것”이라며 “며칠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존 로스 선교사의 무덤을 방문했다”고 설명했다. 묘지 관리인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묘지와는 전혀 상관없으며, 집이 묘지 입구에 위치해 있는 것일 뿐”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묘소로 가는 흙길엔 다람쥐가 뛰어다니고 새들이 맑은 소리로 울어댔다. 아스팔트 하나 깔지 않고 묘지마저 공원처럼 만들어낸 영국인들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여기저기 쓰러진 비석들이 보였다. 나무 앞에 위치한 비석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한아름 커버린 나무에 밀려 엎어진 것도 많았다.
“여깁니다.” 숨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중국 만주지역 개신교의 선구자이자, 최초의 한국어 신약전서 번역자 존 로스의 무덤이었다. 2m 높이의 묘비엔 존 로스가 74세의 나이로 1915년 8월7일 에든버러에 묻혔으며, 그 아래엔 그의 4명의 자녀가 중국에서 사망했다고 기술 돼 있었다.
로스는 북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1842년 7월6일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는 1865년 에든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회 신학부에 입학해 1870년까지 신학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섬에서 목회하던 그는 중국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중국선교사로 1872년 3월20일 안수를 받고 6일 후 스튜어트와 결혼한다. 그리고 4월 초 중국으로 출발했다.
로스가 중국 선교사로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873년 8월23일이다. 당시 30세였던 로스는 이듬해 3월 아내 스튜어트가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아픔을 겪는다. 갑작스런 아내와의 사별은 그를 만주 선교사로 헌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윌리엄슨 목사로부터 6년 전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의 대동강에 갔다가 죽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로스 목사는 아내와 사별의 슬픔을 딛고 선배 선교사의 안타까운 순교소식을 접하면서 복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아시아의 마지막 땅 조선에 복음의 문을 열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1876년 로스는 조선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가 바로 이응찬이다. 이응찬은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자로 꼽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당시 조선은 엄격한 쇄국정책 속에서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로스는 한국인 번역자들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신약성경 번역작업을 마친다. “성경번역은 마치 파나마운하를 하나 파는 것과 맞먹는 일”이라고 평가했던 게일 선교사의 말처럼 10년의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가든 밤마다 붉게 세워져 있는 네온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한다. 몇몇 한인 목회자는 그의 헌신에 감사하며 한국교회를 대표해 작은 기념비를 묘비 하단에 설치했다. 기념비엔 ‘한국교회를 위해 신약성경을 번역했으며, 한국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건네줬다’고 기록돼 있다.
“한국에는 몇 명의 크리스천이 있습니까.” 마카이씨가 묘소를 둘러보고 있던 기자에게 물었다. “1000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1000만명이요? 정말 대단하네요.” “아닙니다. 당신과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 존 로스 선교사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군요. 스코틀랜드는 크리스천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지금은 무척 어려운 상황이죠. 특히 이슬람이 그 세력을 무섭게 확장하고 있죠.” 좀 더 둘러보라는 말을 하곤 마카이씨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로스 선교사의 묘를 둘러본 뒤 묘지공원을 산책했다. 묘비마다 죽은 사람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들어 있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자녀를 그리며 애달파하는 부모, 먼저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것을 아쉬워하며 다시 만날 것을 평생 기다리겠다고 다짐한 자녀 등. 수많은 비석들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존 로스는 자신의 생애와 비석을 통해 ‘짧은 인생,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에든버러=글·사진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