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8) 강의실 가는 것도 힘든데 폐 질환까지, 왜 나에게만…

입력 2010-06-09 17:24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미소지어주면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어요.”

내 책도 아닌데 그만 빨간 줄까지 긋고 말았다. 1985년 초겨울, 서울대 도서관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주인공은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한 광부들을 돌보는 간호사였다. 어느 비바람이 치는 밤에 갱이 무너졌다. 광부들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다 그만 전봇대에 부딪쳐 척추를 다치고 만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녀는 다시 휠체어를 타고 그곳에 나타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광부들을 치료한다. 누군가 그녀에게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담담히 ‘하나님의 미소’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나에게 조용히 미소지어주는 한 분이 계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수천 번 자문했던 ‘왜?’에 대한 의문의 거대한 빙산이 한순간에 스르르 무너졌다. 목발을 짚었지만 마음은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외로우면 그분은 더 괴로워하셨다. 내가 슬픔에 빠지면 그분은 서럽게 우셨다. 낮은 자들의 고통을 그분은 온몸으로 견디시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었다. 나보다 수천 배, 수억 배 아파하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이런 체험 가운데 내 학교생활은 여전히 고달팠다. 신림동 지하방에서 학교까지 걷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렸다.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를 오가는 길은 구만리처럼 멀었다. 특히 인문대 수업이 4층에 있고, 연이어 자연대 건물 4층에 수업이 있으면 아예 강의를 포기했다. 그 많은 계단을 두 목발을 짚고 겨우 도착할 때면 강의는 이미 끝나갈 무렵이다. 집에 돌아오면 늘 녹초가 됐다. 이런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대학 3학년 초부터 왼쪽 폐가 이상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다. 너무 심한 육신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폐에 큰 구멍이 났다. 응급처치를 하여 갈비뼈와 폐 사이에 찬 공기를 제거하고 간신히 살아났다. 2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며칠 후 퇴원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하지만 폐의 통증은 계속됐다.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 응급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어느 아저씨가 암에 걸린 부인을 둘러업고 응급실에 들어왔다. 그 부인은 고통으로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접수창구에서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저씨는 의사들에게 사정사정하다 결국 그들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치의에게 화가 나서 물었다. “왜 저 사람을 치료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의사는 “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어 의료보호 대상자를 자꾸 받으면 병원이 헤어날 길이 없고, 아주머니의 상태가 별로 가망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병원을 나와 버렸다. 무작정 나온 나를 본 어머니는 “네가 죽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켰다. 갈비뼈 사이를 벌려 폐를 수술했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진통제를 맞아도 몇 시간뿐, 밤에는 이를 악물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세요. 너무 아파요. 차라리 숨을 쉬지 않는 게 낫겠어요.”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