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제주도 떠날땐 200여명… 살아 온 사람은 절반도 안돼”
입력 2010-06-08 18:47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3부 강제동원 더 깊이 들여다보기
③ 국외 동원 그늘에 가리어진 국내 동원
열일곱 살 소년의 임무는 미군 전투기가 날아오는지 감시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온종일 남서쪽 하늘을 쳐다봤다. 새까만 점이 점점 커질 때마다 일본 군인에게 달려갔다. “비행기가 와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약 170m 높이 옥매산 꼭대기가 소년의 근무지였다.
1945년 8월 23일, 소년은 더 이상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온 나라가 광복으로 들떠 있었다. 소년은 친구들과 집 근처 바닷가에서 낚시를 했다. 다섯 달 전 제주도로 끌려간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때, 바닷가에 남자 한 무리가 해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남자들은 홀딱 벗고 해변에서 뭍으로 다가왔다. 끌려갔던 마을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은 손바닥만한 천으로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었다. 지친 듯 종종걸음으로 각자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눈으로 무리를 헤집었지만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먼저 집에 돌아와 있었다. 무리와 다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날부터 피를 토했다. 제주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배에 불이 났다고 했다.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한참 있다가 일본군 배가 아버지를 구했다고 했다. 배에는 200명 넘게 조선인이 있었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반도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2년간 앓다가 세상을 떴다. 결핵이 사인(死因)이었다. 바닷물에 오랫동안 빠져 있어 폐가 상했다. 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오래지 않아 병으로 숨졌다. 소년은 그 뒤 고향에서 60여년을 힘들게 살았다. 해남군 문내면 신흥마을에 사는 박장규(81)씨가 그다. “동네가 쑥대밭이 됐어. 생계를 유지 못할 판이었어.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났지.”
박씨 아버지가 당한 일은 이른바 ‘옥매광산 노동자 조난사건’이다. 군사시설 구축을 위해 제주도로 끌려갔던 해남 지역 조선인이 귀환 과정에서 바다에 빠져 숨지거나 겨우 살아왔다. 피해자는 옥매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옥매산에서는 옥의 원료인 명반석이 많이 났다. 지금도 옥매산 근처에는 옥을 제련하는 곳이라는 뜻의 옥연마을이 있다. 인근 초등학교 이름도 옥동초등학교다.
일제강점기 옥매산은 일본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가 운영했다. 조선인 1200명이 이곳에서 일했다. 임금을 받는 일반 노동자였다. 이 가운데 200여명이 제주도로 강제동원된 건 1945년 3월쯤이었다. 오전 10시 갑자기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갑자기 모이라고 하더니 곧바로 우리를 선창으로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제주도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고 박종철씨, 1995년 발행된 해남군사(史)에서 증언)
이들은 제주도 남서쪽 모슬포 근처에서 군사시설물을 만드는 작업에 투입됐다. 굴을 뚫고 진지를 구축했다. 포탄 등 군수물자를 날랐다. 박씨 아버지는 비행기 격납고 작업장에서 일했다.
생존자 김백운(82·전남 목포시)씨는 짐승처럼 취급받았다고 기억했다. “나는 같이 간 친형이 기술자여서 나중에 군속 대접을 받았는데 처음에 포탄 운반할 때는 보리조차 섞이지 않은 수수밥을 먹었어.”
사고 상황은 지금도 생생하다. “새벽 1시30분 제주를 출발했어. 날이 훤해지는데 배가 고장 났다 이거야. 조금 있다가 고쳐서 갔어. 그러다가 또 고장 났어. 세 번째 고장이 났는데 기관실에서 불이 난 거야. 들은 말(‘바다에서 수영하려면 옷을 입고 있어선 안 된다’)이 있어 빤스만 입고 다 벗었지. 펑펑 터지면서 불덩어리가 튄 거여. 아침 8시쯤 바다로 뛰어내렸어.”
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나무 판때기에 의지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 시간 동안 거친 풍랑에 휩쓸렸다. “배가 온다. 배가 와.” 생사의 기로에서 일본군 군함이 나타났다. “내가 세 번째로 배에 올라갔어. 로프를 내려주더구먼. 끌어올린 뒤 내지인(內地人)이 없느냐고 찾더라고. 우리를 인솔한 옥매광산 운영회사 일본인 직원을 찾는 거였어.”
제주도를 떠날 때 배에는 일본인 다섯 명이 있었다. 세 사람은 구조됐는데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바다에 자국인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구조를 멈췄다. 조선인 수십 명이 부러진 돛대 등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일본 군함은 이들을 외면하고 뱃머리를 돌렸다. 그리곤 구조된 조선인들을 인근 청산도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배에 탄 조선인이 몇 명이었는지, 사망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남군사(史)에는 조선인 탑승자 220명 가운데 119명이 바다에서 숨졌고 101명만 살아남았다고 적혀 있다. 해남군사 집계 수치도 사건 발생 50년 뒤 일부 생존자의 기억에 의존해 작성된 것이라 정확하다고 하긴 힘들다.
비극적 사건이 방치된 이유는 광복 후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 원인을 포함해 이 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증언할 생존자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희생자의 자식마저 늙어 죽음을 바라볼 정도로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해남=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