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연숙] 조금만 더

입력 2010-06-08 17:46


남원으로 가는 용산 출발 6시50분 기차는 한가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친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는 남원에 도착했다. 10년 만의 방문이지만 남원은 정비를 조금 한 것 외에는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리산 둘레길을 여행하기 위해 남원에 온 우리는 둘레길이 시작되는 주천으로 향했다. 운동 부족인 우리에게 지리산 등반은 무리일 것 같아 대신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둘레길은 지리산 주위에 옛길, 고갯길, 숲길 등을 연결한 것으로 동네 주민들의 협조로 조성이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는 둘레길 다섯 코스 중 두 코스를 다음날까지 완주하기로 하고 1박2일 여정을 시작했다. 사진을 전공한 내 친구는 카메라 두 대를 어깨에 메고 배낭에는 2리터짜리 물통도 하나 짊어지는 여유를 부렸다.

친구가 준비한 검은 봉투에 둘레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며 걷기 시작했다. 산책을 시작한 지 30분이나 지났을까. 약간의 경사는 있을지라도 거의 평지일 걸로 추측했던 둘레길이 등산 코스로 이어졌다. 우리는 어느새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예측하지 못한 오르막길에 친구는 지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낯설었던 인사가 익숙해질 즈음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친구는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매번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는 메아리로 돌아왔다. 그 메아리를 꽤 여러 번 들었을 때에야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는 농담 삼아 조금만 더 가면 된다더니 이게 조금이냐며, 사람들에게 속고 지리산에 속았다며 상쾌한 바람에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쓰레기봉투가 가득해졌을 즈음 산을 내려왔고, ‘뽕짝’이 구수하게 퍼지는 비닐하우스 한 채를 만났다. 사이다를 마신 후 친구는 주인 할머니에게 우리가 묵을 민박집까지 거리를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그래서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쉬며 얘기하며 사진 찍으며 찍히며 걷다 보니 4시간이 걸려 민박집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그토록 원하시던 ‘민핫토’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맛있는 밥을 먹고, 사는 얘기도 듣고 나니 어느새 떠날 때가 되었다. 인사를 하고 다음 코스까지 걸릴 시간을 여쭤봤다. 역시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신다. 우리는 6시간 걸리는 거리를 조금씩 쉬며 걸어야 했다.

지친 우리에게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면 그 길을 걷는 과정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금이었기에 느리게 걸으며 생각하고 유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의 표현은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지혜로웠다. ‘조금’은 지친 내 친구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단어이기도 했다. 느린 듯 살아가는 그들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보인 모습은 여유로웠고 담백했다. 마지막 세 코스를 남겨 둔 지금, 지리산과 지리산의 그들이 벌써 그리워진다.

김연숙 출판도시문화재단 기획홍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