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하나님] 추영례 은맥여성문화센터 원장

입력 2010-06-08 22:34


남편 옥바라지-부모님 투병

고통의 세월 견디게 해준 힘


지금은 단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못 살지만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일종의 사치품으로만 여겼었다. 서울 만리동 손이 귀한 집안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불심이 매우 깊은 분으로 불공을 드려 나를 낳았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팔자려니 했다. 민주화 운동에 빠진 남편(이재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의 옥바라지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땐 신혼 재미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혼식 당일부터 당국에 잡혀가기 시작하던 남편은 감옥을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1980년대 초반 역촌성결교회에 나간 것이 인연이 됐다. 바느질 가게를 했는데 목사님이 구역예배를 드리러 오는 날이 제일 겁났다. 단 돈 1000원이 아쉬울 때라 헌금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렵게 한 푼, 두 푼 벌어서 3남매를 키웠다. 남편 옥바라지에 어머니의 위암 투병,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뒷수발이 먼저였다.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은 서울 갈현동 세광교회에 출석한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 모든 고통의 세월을 견디게 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90년대 중반 성령을 받고부터 내 삶의 기준과 인생관이 달라졌다. 바쁜 선거철에도 주일성수와 성가대 봉사를 놓치지 않았다.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그렇게만 두지 않으셨다. 교만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나에게도 제동을 거셨다. 2008년 가을엔 왼쪽 다리 연골을 다쳐서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남편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근신하고 지내라는 메시지였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행복마저 빼앗으셨다. 지난 14년간 해오던 성가대 봉사 활동을 못하게 된 것이었다. 오른쪽 엉치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더니 성대결절이니 가급적 목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메조 소프라노였는데 알토 소리도 나오지 않게 됐다.

담임목사님께 울면서 호소했다. 목사님은 “그냥 립싱크를 해도 되니까 서있기만 하라”고 하셨다. 그럴 수는 없었다. 조용히 성가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기도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로 20년째 운영하고 있는 은맥여성문화센터는 은혜 속에 운영되고 있다. 1990년 은평 지역의 문화를 사랑하고 맥을 잇자는 취지에서 ‘은맥여성문화센터’를 세웠다. 당시엔 개인적으로 배울 수 있는 사설 학원은 많았지만 문화센터라는 개념이 낯선 때였다. 영어회화, 댄스스포츠 등의 인기 강좌를 한 달에 1만원이면 수강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람 있을 때는 우울증이 있는 분들이 문화센터에 왔다가 우울증을 털어내고 새 삶을 살게 되는 순간이다.

올해 62세, 소띠다. 오늘도 나는 언제, 어디서든 몸을 낮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천천히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말처럼 뭉툭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정리=윤중식, 사진=최종학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