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7) 대학시절 알게된 누나 권유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입력 2010-06-08 17:27


1982년, 충남고에 1등으로 입학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피시던 어머니가 허리 디스크로 꼼짝을 못하시게 됐다. 더 이상 과수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부모님은 과수원을 헐값에 팔고 대전으로 오셨다. 6남매와 부모님은 조그마한 집 한 채에 사촌 누나와 함께 전세로 살았다. 참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여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아버지는 공사장 잡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대학생 3명에 고등학생까지 학생만 4명인 집안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큰형은 입주과외로 집을 나갔다. 우리는 따로 공부방이 없었다. 방 한 칸에서 한쪽에서는 TV를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을 했다. 나는 그 한구석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힘겨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1985년, 서울대 수학과에 합격했다. 나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육체적인 활동이 적은 학문을 찾다보니 수학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대였다. “안디야, 방 한 칸도 없는디 워떠케 서울로 유학을 간디야? 여그서 장학금 받고 기냥 댕기는 겨.” 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그런 아버지와 가족을 남기고 서울로 향했다. 300만원을 주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 인근 지하 단칸 전세방을 얻었다. 다행이 학자금이 면제되었다. 약간의 장학금이 나와, 부족한 생활비는 과외를 하며 충당하는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캠퍼스는 연일 민주화 시위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연상하며 스스로 용기를 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짧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나는 늘 이 말을 위안 삼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때까지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하는 그해 가을 어느 날, 구세주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강의를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쓸 수 없는 나는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어갔다.

갑자기 연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듯했다.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여자가 혼자 쓰는 우산이라 둘 다 비에 흠뻑 젖었다. 나는 (대학원생)그 누나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혼자 쓰고 가시지요.” 나는 나 자신에게 희망이 없음을, 그러한 나 자신을 포기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누나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학교 정문을 나설 때쯤, 그는 참았던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순간 용수철 같이 답했다. “수백번, 아니 수천번 더 생각했을 겁니다.” 그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나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얼마나 많이 물었던가. 그 누나는 나를 신림동 단칸방까지 바래다주었다. “기독대학인회(ESF)라는 선교 동아리가 있어요. 그룹 성경공부가 있으니 참석해 보세요.”

며칠 후 나는 ESF사람들과 인문대 빈 강의실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형들은 내가 늙어 보인다며 재수생인지 물었다. 아마도 내 가시밭길 인생이 나를 겉늙게 했었나 보다. 나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세상의 로고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