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6) 재활원 ‘최 선생님’ 헌신적 도움으로 일반 중학교 입학
입력 2010-06-07 20:57
재활원은 생사고락의 축소판이었다. 소심하고 가녀린 외모 때문에 아이들은 나를 여자라고 놀려댔다. 때때로 교회나 구호단체에서 빵과 우유를 우리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를 전후해 노래나 연극공연을 보여주었는데 1시간 정도의 일회성 공연이 끝나면 우린 더욱더 버려진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대부분 10원짜리 과자 ‘라면땅’ 한 봉지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에게 꿈을 심어준 선생님이 계셨다. 최화복 선생님이다. 그분은 일반 국민(초등)학교에 재직하고 계셨는데 장애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스스로 재활원으로 오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서예와 음악을 가르쳐 주셨다. 2년 동안 붓글씨를 열심히 배운 결과 전국대회에 나가 국무총리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선생님은 공부할 때 중요한 단어를 사인펜으로 지우게 했다. 나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통째로 외웠다. 또 선생님이 지휘하는 합주부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우린 삼육재활원에서 열리는 합주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최 선생님은 내가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신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내 인생을 통틀어 교육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진심으로 한 학생을 위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최 선생님은 이제부터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며 일반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똑같았다. 장애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활원 출신을 입학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셨다고 했다.
“이 아이가 언젠가는 이 학교의 명예를 빛낼 것입니다. 재능이 보통 뛰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큰 인물이 될 터이니 학교 문턱만 넘게 해주세요.”
다행히 그 교장 선생님은 나의 입학을 허락했다. 최 선생님의 설득 덕분이었다. 지금 최 선생님은 재활원을 나오셔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수지침을 놓아주고 계신다.
어렵게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신적인 방황은 계속됐다. 담임선생님이 걱정이 돼 상담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지만 나는 그 선생님이 두 손을 들 정도로 복잡한 아이였다.
교회에 나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 언덕 위에 있던 방주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 전도사님한테 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왜,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하지만 전도사님은 나의 질문을 너무 쉽게 여겼다. 아직도 그런 것을 모르느냐며 외면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아무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끈이 이어질 뻔했지만 단 몇 주일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예수를 믿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학업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참고서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시험만 보면 항상 1등을 했다. 1981년 고입 연합고사를 봤는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강아, 니가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맞았다야, 이것이 시방 꿈인 겨? 생신겨?” 나를 제일 아껴주시던 담임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두 선생님은 나를 번갈아 꼭 안아주셨다. 며칠 후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TV 방송에 출연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