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60)
입력 2010-06-07 14:00
寢食提供
“1726년 3월 11일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 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사상을 그들에게 불어 넣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을 제외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5월 24일은 요한 웨슬리 회심 27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요즘 한국 감리교가 돌아가는 상황과 맞물려 분란한 마음이나 다잡자고 ‘요한 웨슬리 전기’를 읽었다. 웨슬리의 회심은 한 마디로 ‘기득권의 포기’라 할 수 있다. 우리 나이로 치자면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을 23세에 그는 영국 사회에서 귀족이 될 수 있는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는 ‘감독’이 될 터였고, 대학의 총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홀연히 확보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웨슬리는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통해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주택과 침식제공은 물론이려니와, 품위유지비와 온갖 출장비, 개인 퇴직금과 교단 차원의 은급금, 차량 제공 및 유지 관리비(간혹 운전기사를 두기도 한다), 보험료, 후생복지비에 자녀 학비, 그리고 18개월 또는 16개월의 봉급, 그 외의 명목으로 누리는 경제적인 이권은 이루 말하기가 어렵다. 어디 그뿐인가? 무형의 ‘종교적인 권위’를 통한 기득권은 또 얼마인가! 그것도 모자라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살면서도 요한 웨슬리를 말한다는 것은 참담 그 자체이다.
간혹 누가 내게 묻는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봉급을 받지 않는다면서요?” 그렇다.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봉급이 없다. 간혹 교회가 나의 빚을 대신 변제해주기는 한다. 그렇다고 그 동안 30여년 목회하면서 남들이 부러워 할 만한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위에 나열된 목사들의 기본적인 기득권은 내게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나는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寢食은 提供받는다. ‘성암교회 목사’라는 타이틀도 만만찮은 사회적 기득권이 된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도시의 전봇대란 전봇대엔 온통 ‘침식제공’ ‘선불가능’이란 작은 전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침식제공이란, 생활의 기본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만 있으면 산다는 말이다.
받느니, 안 받느니 해도 나는 침식을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무형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이만하면 나도 꽤 내려놓았다 싶었는데, 웨슬리의 전기를 읽자니 이조차 부끄럽기 그지없다.
<춘천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