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클린트 이스트우드

입력 2010-06-06 18:19


5월 마지막 날, 일본에 사는 독일인 친구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오늘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생일이지? 너를 위한 행복한 날이네!!!”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 태어난 날을 확인하고 축하 메일을 보내주다니, 내 생일을 기억해준 것보다 더 기뻤다.

영화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고전을 보며 웃고 울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만큼 나를 설레게 하는 영화인은 없다. 그가 스크린에 등장하면 가슴이 쿵쾅거려 심호흡을 해야 하고, 그의 연출작은 고매하여 부족한 어휘력이 부끄럽다. 이 순간도 그렇다. 흠모하는 이에 대한 글을 쓰려니, 손이 떨려 자판 고르는 게 힘들다.

나의 블로그 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랑 I Love Clint Eastwood’인 것도, 블로그 주소가 그와 나의 성에다 행운의 숫자를 붙인 합성(blog.naver.com/eastok7)인 것도, 블로그 소개 난에 “다음 세상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살고 싶은 영화칼럼니스트 옥선희의 서재”라고 써넣은 것도, 명함에 그의 사진을 넣은 것도 이스트우드가 도달한 영화 세계,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에 비하면 초라한 애정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영화 이야기를 하는 세상이라, 나는 “무슨 영화가 재미있어?”라는 질문에 답하길 꺼린다. 그러나 이스트우드에 대해 물으면 내 눈이 빛나고 말이 빨라진다고 한다. 이스트우드를 ‘마카로니 웨스턴’ 3부작의 무표정한 이방인, 매그넘 44를 겨누던 ‘더티 해리’의 거친 형사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고전을 보지 못한 세대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비 맞고 서 있던 궁상맞은 늙은이로 이스트우드를 폄하한다. 평론가들이 감독 이스트우드에 주목한 것이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이후니까, 관객의 편견과 몰이해는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이스트우드의 연출은 데뷔작부터 단단했고, 나이에 비례해 인생 성찰이 깊어지고 있다. 전성기라는 말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평생에 걸쳐 꾸준히 걸작을 내놓는 예술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더구나 돈과 인력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투입되는 상업 영화 세상에서 매년 한 편 꼴로 걸작을 내놓다니, 기적의 사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영화 어법은 외모와 연기, 이름만큼이나 담백하고 슬림하며 우아하다. “평론가가 추천하는 영화는 어렵고 이상 해” “상 받은 영화는 골치 아파”라는 이들이 많지만, 이스트우드 영화는 직설적이어서 “이렇게 쉬운 게 걸작이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흑백 영화 시대 걸작 몇 편만 떠올려도, 우문에 답이 될 것이다.

곁에만 있어도 감화된다는 인격, 독학으로 마스터한 작곡과 피아노 연주 실력에 재즈 사랑까지 ‘영상 세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82세가 되는 2012년 작이 예고되어 있을 만큼 건강과 예술혼이 여전한 위대한 영화 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34번째 연출작을 기다리며 그와 동시대를 살아감에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

옥선희(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