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이프 수천개 이어붙여 ‘그림같은 소나무’ 세워… 이길래 ‘나무, 형상을 구축하다’전
입력 2010-06-06 17:39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 들어서면 1층과 2층을 관통하는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관람객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6.5m 높이의 웅장한 소나무 부조 작품으로 초록의 솔잎까지 정교하게 표현한 것이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질 정도로 회화성이 두드러진다. 새들이 진짜 소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는 솔거의 ‘노송도’(老松圖)를 떠올리게 한다.
중견 조각가 이길래(49)가 동파이프로 만들어낸 ‘노송’이다. 충북 괴산 시골마을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고된 노동의 연속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먼저 동파이프를 일정한 간격으로 잘게 자른 뒤 측면을 눌러 타원형의 고리를 만든다. 그런 다음 고리 수백∼수천 개를 용접으로 이어 붙여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완성된 형상에 부분적으로 깎아내거나 검게 칠하면 구불구불 멋들어진 소나무가 탄생한다.
조각과 회화의 접점을 보여주는 그의 입체 작품은 단지 소나무 형태를 넘어 서로 붙잡고 씨름을 하거나 혼자 뭔가 생각에 잠긴 인간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묘한 외계 생명체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직접 동파이프를 자르고 붙이는 작가의 손은 상처 투성이로 성할 날이 없지만 그런 땀과 열정이 있기에 작품은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작가는 여러 가지 금속 중 유독 동(구리)을 고집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차갑지만 구리는 따뜻한 것 같아요. 굉장히 다양한 모양으로 변형시킬 수 있거든요. 구리는 그런 면에서 다른 금속들보다 훨씬 인간적이죠.” 차갑고 기계적인 동파이프에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는 그는 꾸준히 재료를 응집하고 끊임없이 시간을 집적하는 ‘현대판 연금술사’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동파이프 소나무를 구부렸다 폈다 자유자재로 다룬다. 소나무로 웅대한 산맥을 만들어낸 ‘소나무산’, 가지를 이리저리 비튼 ‘애굽은 소나무’, 세 개의 가지를 뻗어내린 ‘삼지송’,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모습의 ‘낙락장송’, 못과 펜으로 그린 드로잉 등 2년 동안 야심차게 준비한 신작 40여점을 ‘나무, 형상을 구축하다’라는 타이틀로 전시장에 내놓았다.
이번 전시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야외광장에서도 열린다. 사립미술관과 공공미술관 공간에서 한 작가의 개인전이 동시에 개최되는 것은 보기 드문 사례로 미술계 안팎의 화제가 되고 있다. 예술의전당 야외광장에는 육중하면서도 섬세한 느낌의 몸집이 작가를 닮은 대형 조각 8점을 선보인다. 삭막한 분위기의 도심 시멘트 광장에서 대자연의 울림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고 우직하게 작업에만 매달린다. 액자가 있는 벽걸이 작품을 찾는 애호가들도 많지만 판매를 하지 않는 미술관 전시를 선호한다. 그는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수시로 떠오르지만 한 길을 가다보면 뭔가 이루어지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면서 “예술은 목표점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인생의 마라톤과 같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9일부터 7월 10일까지(02-736-4371).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