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5) 어머니 땀냄새 생각하며 힘들었던 재활원 생활 견뎌

입력 2010-06-06 18:05


집을 떠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외딴곳이지만 아늑한 집을 떠나려니 눈이 붉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 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감당하기 힘든 불안감이 엄습했다. 꼴도 보기 싫은 목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국분이 누나를 따라 대전에 있는 재활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1976년이었다. 재활원은 군번 없는 군대였다. 공짜로 밥을 주는 법이 없었다. 식사 당번, 화장실 청소 등 각자 맡은 임무가 있었다. 우리는 형들의 감독 아래 매일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첫날부터 일이 터졌다. 나보다 조금 먼저 온 아이가 시비를 걸었다. 순간 “참고 또 참아야 뒤여. 아무도 니를 봐주지 않을 겨, 그렁게 단디 하그라. 알것지?”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가 생각났다. 하지만 무작정 당할 수만은 없었다. 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웠다. 서열을 정하는 통과의례였다. 한참 동안 싸움을 하고 나니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걸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재활원에서 먹은 첫날 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밥이 아니라 톱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김치는 차라리 소금덩어리였다. 그러나 100여명의 아이들은 이 밥을 게 눈 감추듯 식판을 비웠다.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식사 끝’이라는 구령이 들렸다. 나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밖으로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난 밤마다 편지를 썼다. “엄마, 보고 싶어요. 제발 나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나 한번도 부치지는 못했다. 내가 참고 걸어가야 할 가시밭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 한 개라도 잘 배워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허지” 하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그곳에는 휠체어를 타고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는 음악동아리가 있었다. 베데스다라고 불렀다. 첼로 하나와 바이올린 2∼3개로 이루어진 앙상블이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지만 악기를 살 수 없었다. 정말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음악은 나의 위로였다. 나의 형편과 세상 근심을 잊게 만들고 상상 속의 자유를 주었다.

큰 꿈이 없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집단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인쇄기술이나 목각인형·장식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외출이 통제되었는데 원감의 눈을 피해 형들은 허락을 받지 않고 외출하다 적발되면 죽도록 맞았다.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누님과 형들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부모도 없는 중증 장애아들이 수두룩했다. 어린 나이에 각양각색의 장애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고아가 된 아이들,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친구들. 가끔씩 영구차에 실려 가는 친구들의 시체를 보는 날은 밤새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언젠가 알베르 카뮈가 쓴 책에서 읽었던 그의 절망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하늘을 부정하지도, 하나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고통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그러나 난 원망을 넘어 희망을 그렸다. 주일마다 설교 말씀을 전하러 오시는 목사님도 큰 용기를 주셨다. 눈을 감고 과수원 외딴집의 따스한 호롱불과 어머니의 땀냄새를 생각하면 힘이 생겼다. 나의 수호천사 국분이 누나가 오는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